노정기(路程記)
이육사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음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었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쩡크와 같아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 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쳐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 쌌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빠진 소라 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머-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들여다보며
서울 집으로 돌아온지 보름이 흘렀다. 그 사이 새로운 프로젝트 준비를 위해 매일 사람들을 만나러 외출을 했고 몇 개의 서류를 썼고 기어이 동생방에 짐을 풀어 내 방을 만들었다. 비가 왔고 술을 비웠다. 문장은 거의 쓰지 못했고 내일, 내일을 기다리며 지난 밤들을 보냈다. 언젠가 할머니가 내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네 창밖은 꽃이 가득하구나 라는 말을 하고 나갔지만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꽃이 다 무어람, 하고 창을 곧 닫아버렸다.
주말밤 서성이는 마음을 달래려고 이것저것 뒤적였지만 결국 잠으로 향하는 일뿐, 마음에 차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 창문을 열었다. 꽃이 만개한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창밖에 이미 다른 계절이 찾아왔고, 나는 아직 낯선 잠자리에 눕는다. 언제나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마음을 쉽게 주지 못한다. 그러니 꽃이 다 무어람. 또다시 이 방을 떠날 때 나는 무엇을 두고 또 무엇을 챙겨 나갈 것인가. 고요한 일요일 아침 시간이 더없이 낯설다. 숨겨둔 보물처럼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내 방 창문 너머 꽃. 익어가는 것 피어나는 것이 순리이거늘, 쉽사리 마음을 줄 수 없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