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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나는 시간 익어가는 방

Day_dreaming 2016. 5. 1. 11:12




노정기(路程記)

이육사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음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었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꿈은 서해(西海) 밀항(密航)하는 쩡크와 같아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암초(暗礁) 벗어나면 태풍(颱風) 싸워가고

전설(傳說) 읽어 산호도(珊瑚島)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 비쳐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 쌌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삭아빠진 소라 껍질에 나는 붙어 왔다

- 항구(港口) 노정(路程) 흘러간 생활(生活) 들여다보며




서울 집으로 돌아온지 보름이 흘렀다. 그 사이 새로운 프로젝트 준비를 위해 매일 사람들을 만나러 외출을 했고 몇 개의 서류를 썼고 기어이 동생방에 짐을 풀어 내 방을 만들었다. 비가 왔고 술을 비웠다. 문장은 거의 쓰지 못했고 내일, 내일을 기다리며 지난 밤들을 보냈다. 언젠가 할머니가 내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네 창밖은 꽃이 가득하구나 라는 말을 하고 나갔지만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꽃이 다 무어람, 하고 창을 곧 닫아버렸다.


주말밤 서성이는 마음을 달래려고 이것저것 뒤적였지만 결국 잠으로 향하는 일뿐, 마음에 차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 창문을 열었다. 꽃이 만개한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창밖에 이미 다른 계절이 찾아왔고, 나는 아직 낯선 잠자리에 눕는다. 언제나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마음을 쉽게 주지 못한다. 그러니 꽃이 다 무어람. 또다시 이 방을 떠날 때 나는 무엇을 두고 또 무엇을 챙겨 나갈 것인가. 고요한 일요일 아침 시간이 더없이 낯설다. 숨겨둔 보물처럼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내 방 창문 너머 꽃. 익어가는 것 피어나는 것이 순리이거늘, 쉽사리 마음을 줄 수 없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