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작업을 하는 동안 글렌 굴드 연주와 라디오를 번걸아 가며 들었다. 틀을 잡고 벽돌을 한 장씩 쌓아올라 갈 때에는 글렌 굴드를, 번역을 하거나 약간의 이미지 작업을 해야할 때에는 라디오를. 두 개의 음악을 때와 용도에 따라 규칙적으로 들어가면서 리듬을 유지하고 최대한 다른 것들로 방해받지 않기위해 시간 분배에 힘썼다. 그렇게해서 어제부로 일단락이 지어졌다. 전 날 밤, 일찍 일어나야하기 때문에 일부러 평소와 다르게 저녁식사 때 마시던 와인도 안하고 누웠건만 머릿속으로 발표 원고들이 지나가고 입밖으로 중얼중얼 새벽녘 눈을 떴을 때 조차도 문장이 생각나서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는 꽤 피곤한 상태였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 부엌으로 나가 전 날 준비해놓은 아침밥을 꺼내 먹고 비교적 순조롭게 학교까지 도착했다. 알파벳 순서 때문에 이번에도 내가 처음으로 발표를 하게되어서 긴장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다행히 사용할 공간을 선생 중 한 분이 이미 세팅을 다 해놓으셨고 나는 내 몫만 준비하면 되었다. 학교 정문에서 우리 할매 선생을 만났고 전 날 밤 본인이 보내신 메일을 봤냐고 물으셨다.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메일을 너무 늦게 확인했지만 걱정하지말라고, 그러면서 나는 네 뒤에 서있을게, 라는 로맨틱한 문장으로 격려를 해주셨다.
발표가 시작되자 거의 반사적으로 외우고 또 외웠던 문장들을 줄줄줄 말하기 시작했는데 앞이 어두워서 사람들의 표정도 살피지 못했고, 어느덧 준비한 시간이 끝났다. 발표를 마쳤고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와 의견들을 주었다. 사실 그 때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마지막 학년이 되니 더더욱 서로의 얼굴을 보기 어려운데 총 25명 남짓되는 사람들의 발표를 모두 한 자리에서 함께 듣는 시간이었다. 실은 별 기대도 그렇다고 실망도 나누지 않는 관계들이라 내 차례가 끝나고 나서는 묵묵히 그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나름대로 지난 3년 혹은 4년간 고군분투하며 헤매고 길을 다시 찾고 하는 과정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갑자기 처음 그 장소에서 오리엔테이션 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 때도 마찬가지로 이전 작업들을 보여주며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였는데, 그 때 부터 지금까지 드문드문이지만 개개인마다 해왔던 작업들이 생각나면서 아 이래서 저 사람이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구나, 라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지금까지 우리 할매 선생은 우리학년 사람들 작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셨는데 어제는 이 분까지도 듣다가 신이 나셔서 아이구 잘했다 잘했어 그래 이거다 이거 이제야 네 진면목이 드러나는구나, 하고 또 서슴없이 칭찬세레를 쏟아내셨다. 내 옆에 앉아있던 이태리 여자애는 평소 면식이 그닥 없는 편이지만, 그 아이의 차례가 되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고, 그 순간 할매 선생이 다 들리게 너도 느꼈냐, 라고 말씀하시면서 너와 제는 거울같구나 그래서 서로 좋은점을 알아보는 구나, 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전반적으로 꽤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오갔고, 평소에는 너스레 떨며 큰소리 치는 애들조차도 진중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떨면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또 다른 이태리 남자애는 평소 과묵한 편인데 늘 잘 웃고 인사도 잘하는 아이이다. 발표를 시작하자마자 덜덜덜 떨며 거의 눈물 쏟기 일보직전에 얼굴을 하고 간신히 마쳤다. 나는 거의 그런 자리에서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편이 아닌데 어제는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리고 외로움과 고독은 다른 것 같다. 나 역시 너 처럼 혼자 스스로 갇혀지내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집중이 안 될 때에는 외로움이 찾아오지만 무언가 시작되고 시간과 공간, 내 존재를 잊기 시작하는 순간 일을 할 수 있고 그 때 아득히 깊은 곳에서 고독감 같은게 느껴지는데 그게 찾아오면 비로소 뭔가를 시작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우리 모두 각자만의 공간, 고립된 것 처럼 보이지만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그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라고 말을 마쳤다. 그 순간 그 남자애가 말을 이어가며 가장 좋아하는 카프카의 문장을 말했는데 올커니, 싶었다. 나 역시 굉장히 좋아하는 문장이라 나도 모르게 맞아 맞아하고 입밖으로 큰 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집중했고, 평소에 입도 안 떼는 내가 말소리를 내니까 다들 신기하게 쳐다봤다. 한참듣고 있던 우리 할매 선생이 특유의 목소리로, 그래 그래 아주 훌륭한 대화들이다 이런것이 필요한 거다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다, 하고 마무리를 하셨다.
5시간 넘게 이어진 발표가 끝이나고, 다들 약간 지친상태로 일어나려 할 때 선생 중 한 분이 코멘트를 하셨다. 지난 몇 해 이 자리를 지켜보면서 오늘처럼 흥미롭고 의미있는 시간은 없었다. 설사 오늘 발표한 논문이 졸업작품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이 자체만으로 여기까지 오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라고.
늘 뭔가를 마치고 학교를 빠져나올 때에는 도망치듯 나오거나 공허함 때문에 힘들었는데 어제는 달랐다.
모두가 각자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느꼈으리라. 그리고 기뻤다. 이 느낌을 나만 받지 않았다는 분명한 확신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