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만의 시간
여자는 웃음소리가 크다 손도 눈도 무엇보다 그 배포가 크다 태어나 단 한 번도 타인에게 굴복한 적 없다는 듯 언제나 그녀 자신의 덩치만큼의 공간을 확보하고 복도를 걷는다 자신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거나 쓸데없다 여겨지는 것이 눈에 띄면 가차없이 삭제시킨다 그녀는 두려울 것이 없다
여자는 튼튼하고 굵은 발목으로 숲을 걸어다닌다 하염없이 내려앉은 안개와 풀 숲 사이 군데군데 피어있는 꽃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눈에 들어찬 모든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듯 눈을 껌벅이며 그것들을 눈속에 넣고 또 넣는다 그것 이외에 다른 것들에게는 전혀 자리를 내주지 않겠다는 굳건한 다짐을 한채 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조심스레 주머니속에 숨겨놓고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쉼없이 숲을 배회한다 집에 도착한다
창밖의 나무는 온전히 그녀만을 위해 춤을 춘다 작은 콧소리로 바람을 들이마시고 입밖으로 내뱉는다 오래된 가구와 따뜻한 불빛이 그녀 주위를 감싸고 언제 먹다 버려둔지 모르는 치즈 한 덩이가 모서리에서 조용히 숨을 다하고 있다 두툼하게 말아진 종이들에 잠시 손가락을 대보고 온도를 느낀다 밤이 가까워오고 있다 그녀는 조용히 문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남편이다 그와 함께 사는 타인이다 그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채 다시 종이위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냄새를 맡고 감촉을 느끼면서 생각에 빠져든다 오전에 다녀왔던 바다가를 떠올린다 아무도 없던 그 바닷가 파도와 모래조차 그녀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모두 숨을 참고 멈춰선 그 때 그녀는 한껏 바다내음을 들이마신다 푸르고 신 어린시절에 맛 보았던 이국의 허브를 떠올린다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그녀의 코 속은 여덟살 시절의 여름만이 꽉차있다
잠들시간이다 침대 머리맡에 놓여진 라일락 향이 은은하게 배어 공기를 감싼다 그녀는 양털 이불을 온몸에 감싸고 발을 감춘다 내가 이제 잠들 시간이니 모두들 조용하도록 이 세계의 시간도 잠시 쉬어도 된다 멈추거라 그녀는 조용히 명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