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점의 얼굴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이 문장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인간이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사랑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첫번엔 걸릴 것 없이 다음문장으로 지나갔다가 두어 번 더 같은 내용의 문장을 읽고나니 의구심이 밀려왔다. 정말 사랑밖에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없는걸까, 얼마나, 지독하게 해야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여타 선택의 여지를 모두 가로챈 것이 정말 사랑이란 말인가.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내안에서 발견했을 때 더없이 스스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가장 강렬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해서 내 존재가 사랑이라는 감정, 시간, 공간, 상대,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가장 온전하게 드러내보이면서 숨기고싶은 것을 발견하는 기회일 것이다. 내가 어떤 작자인지는 실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보다 잘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은 고리타분한 말이 아니라 진실이다. 때문에 사랑이 깨지고 흩어졌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의 존재자체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결국 사랑을 가운데 두고 나든 상대든 상대를 통해 발견하게 된 나 자신이든 상실되어가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나를 목격자처럼 내팽겨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고독사'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봤다. 콜레라 시대에서 사랑이 죽음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면, 이 시대에는 말그대로 '고독'이 죽음의 원인으로 그려진다. 주인공들은 같은 직장에서 만나는데, 그 직장이 '고독사'한 사람들의 유품 정리 및 청소를 해주는 업체이다. 장소의 주인은 죽었고, 물건들도 말없이 서서히 따라 죽어간다. 대부분 가족들은 유품을 모두 폐기하길 원한다. 주인이 살아있을 때에도 고요히 그 옆을 지키다가 죽고나니 물건들은 말그대로 쓸모가 없어진 거다. 기억도 흔적도 고독하게 죽어버리는 거다.
어쩌면 전형적인 전개로 흐를뻔 하다가도 몇몇 장면에서는 흠찟 놀랐다. 이를테면, 주인공의 이 대사.
"죽는 순간 인간은 누구다 혼자다.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은 누군가와 함께이고 싶다."
사랑이든 고독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우리 스스로를 좀먹고 파멸에 치닫게만드는 치명적인 원인은 나 자신이 망각의 존재로 되어가는 것을 발견하는 것 아닐까. 사랑받을 수 없는, 인정받을 수 없는, 무력한, 쓸모 없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데에서 오는 상실감이 아니라 내 스스로 오롯히 얼굴을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상황 말이다. 이 세계에서 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내 얼굴뿐인 형국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