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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극지의 시
Day_dreaming
2015. 12. 27. 14:24
말의 자기 규정성, 자기 회귀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시라는 장르라는 사실은 길지 않은 우리 시사(詩史)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소월이나 육사뿐 아니라 백석과 윤동주, 이상과 김수영의 삶과 시를 어떻게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써,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의 일차적인 희생자가 되고, 그가 좌초한 희생을 어떻게든 피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말은 일종의 상징이 되는 것이지요. 사실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말은 머리 위 도끼날처럼 제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중략) 시가 지향하는 자리, 시인이 머물러야 하는 자리는 더이상 물러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극지'이고, 그 지점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무작정 버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시는 머리가 아니라 다리로 쓰는 것이며, 시가 있는 자리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을 연소함으로써 발길 수 있습니다. 시에 대한 공부는 자기 안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것이지, 그것을 이론이나 사상으로 대체하려 하면 도리어 멀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저는 본래 출발했던 그 자리만을 놓치지 않으려 애쓸 것입니다.
/ 이성복, 제11회 이육사 시문학상 수상 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