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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박하

Day_dreaming 2012. 1. 8. 22:22
다시,
박하를 집어들다

"촌로들은 다 그렇게 얘기하지요. 촌로들의 할아버지들도 그렇게 얘기했을 것이 틀림없고요. 이곳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오지라서, 한번 이야기가 생겨나면 저 바위들처럼 완강하게 버티지요. 잊히지 않으려고 사람의 혀로 들어가요. 그러면 혀가 물레가 되어 기억들을 지어내는 건데, 기억들을 베틀 위에 올려놓고 킬림(Kilim, 양탄자)의 무한한 문양을 짜내는 것처럼 이어집니다. 기억은 사라지고 문양만 남지요. 기억은 이야기가 생겨나면 사라지는 겁니다. 잊히는 거지요. 그러니 이 일화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p.180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있었으나 한 번도 찰랑거린 적 없다고 인정하지 않았던 물이 데워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 마음속의 나무들은 서둘러 꽃이 피었다가 졌고 열매를 맺었으며 그 열매들은 내 마음속의 태양 아래에서 익다가 금방 쿵, 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잎들이 졌으며 겨울이 왔고 눈이 펑펑 내렸다. 그 길을 한달음에 달려가서 단 한 번도 하지 못한 말들을 하고 싶었으나 지독하게 내리는 눈 속에서 내 사랑의 언어는 숨어버리기 일쑤였다. 내 마음속 풍경들은 그동안 니스 칠에 덮여있었으나 하남을 만나면서 그 칠이 벗겨진 듯했다. 모든 풍경들이 생생했다. 베르테르와 달리 내게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신전의 돌벽 사이에 서 있던 내 양 볼이 갑자기 훅 하고 달아올랐다. / p.170


"아, 그렇구나, 하남. 이름도 하남이군. 노마드들은 아는 게 많아. 정주하는 인간들이 모르는 세계의 비밀을 많이 알지. 그들에게는 바람도 이야기를 들려주고 물도 이야기를 들려주고 새들도 꽃들도 그래. 어쩌면 지나간 시간이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정주하는 사람들이 다 잊은 이야기도 그들은 다 기억하니까. / p. 138


사막을 건널 때, 산맥을 가로지를 때, 도시와 마을을 지나칠 때, 강과 바다를 따라 걸어갈 때, 그리고 그런 시간이 일생을 통하여 계속 될 때 노마드들은 바깥의 풍경을 내면으로 끌어들인다고 카라카야가 말했다. 그는 쉬었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지나가는 동안 잠시 스친 인간과 가축, 곤충, 꽃과 나무의 표정은 밤에 피워놓은 모닥불에서 다시 살아나 노마드의 가슴속에 겹겹이 쌓인다고 했다. 그것은 때로는 바람이고 때로는 모래이며 결국 삶이었다. 노마드는 노마드로 태어나 노마드로 살다 죽을 때, 기억이 가장 엷은 곳에 자신을 묻는다고 했다. 삶을 떠돌았던 기억이 선명한 노마드는 죽지 못한다고 말했다. 죽음을 맞은 노마드들은 그들의 기억을 태우는 것처럼 입고 있던 옷과 지니고 다닌 모든 것들 또한 태운다고 했다. 그리고 접어놓은 모서리처럼 좁은 틈에다가 삶의 거죽인 육신을 묻는다고… 하지만 하남에게 들어온 시간과 공간은 여느 노마드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그 시공 속에서 새로 생명을 받은 것처럼, 그리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처럼, 결국엔 그 삶이 끝난 것처럼, 생생하게 그 모든 과정을 재현해낼 줄 알았다고 했다.

/p.214


1월 6일 작성중, 중단
기억과 비밀,
내 스스로 쉬이 떨쳐낼 수 없는 이야기들.
식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됨
잎사귀의 힘줄들, 면이 드러내보이는 존재증명
긴 문장을 쓰기 주저
나는 더 괴롭힘을 당해봐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