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밑줄긋기)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Day_dreaming 2013. 12. 26. 20:48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 과거도 착취당한다, 2009


모든 시간이 같은 시간은 아니며, 모든 땅이 같은 땅은 아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같은 길이로 쪼개서 달력을 만들지만 어떤 날은 다른 날과 다르고 어떤 시간은 다른 시간과 다르다. 어떤 독재 권력이 추석을 9월 18일로 바꾸고 그날에 차례를 지내라고 강압할 수는 있어도, 이 나라 사람들을 남북으로 이동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추석인 날을 추석 아닌 날과 다르게 하여, 그 많은 사람들을 제 고향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이 이 나라의 시간속에 쌓아놓은 기억이다. 땅이라고 다를까. 어느 부자가 어느 언덕에 아무리 호화로운 집을 지어놓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루이틀도 아닌 오랜 세월에 걸쳐 내 고개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 비옥한 땅에서건 척박한 땅에서건 사람들이 살고, 꿈꾸고, 고뇌하는 가운데 조금 특별한 일을 실천하려 했던 기억이 한 땅을 다른 땅과 다르게 하고, 내 몸을 나도 모르게 움직이게 한다. 땅이 그 기억을 간직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 사람이 이 땅에서 반만년을 살았다 한들, 한 사람이 이 땅에서 백년을 산다 한들, 단 한순가도 살지 않은 것이나 같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 기억과 장소, 2010




몇 년 전 어떤날을 기점으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마음이 한껏 더 불안해졌다 눈앞에 없으면 불안하고 눈앞에 있으면 견디기 힘든 그런 상황. 그래서 잠자코 25일이 끝날 때 까지 숨죽여 기다리는 것이다. 무슨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공포를 누르기 위해 시선을 딴데로 팔고 한껏 들떴다 금방 입이 닫힌다. 밤이 열리고 닫힐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비로소 아무일 없다, 라는 전화를 받고 나서야 아직 엄마도 서울도 살아있구나 싶은거다. 그제야 그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스스로 믿는다. 1년 뒤 5년 뒤 10년 뒤 까지도 이런 기억들을 붙잡으며 살고싶지 않다. 4년 전엔 한 남국으로 가는 짐을 싸고 있었고, 3년 전엔 아무도 부탁하지 않은 내 책 서문을 쓰고 앉아있었다면 2년 전엔 여기까지 와준 애인과 눈오는 낭만적인 거리에서 길길이 날 뛰고 싸웠다 작년부터 혼자 보내기 시작했다 불안한 것은 크게 가시지 않았아도 최악의 상황의 경우의 숫자들의 상상력이 넓어져 되려 마음이 놓였다 어쨌든 올해도 무사히, 크리스마스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