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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01.23
Day_dreaming
2011. 1. 23. 11:17
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65p-66p
시각을 통해 사람은 스스로의 좌표를 확인한다. 다른 감각에 의해 인지된 것들마저
종종 시각적 용어로 변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현훈, 현기증이란 병리학적 용어는
귀의 이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주위가 회전하는 것으로서의 공간적 장애로 경험된다.]
공간이 물리적 전제 조건임을 알게 되는 것 역시 시각에 힘입고 있다.
시각에 의해 세계는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와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시각은, 그것이 펼치는 공관과 함께 우리로부터 세계를 거두어 가기도 한다.
어떤 것도 이만큼 양면적인 것은 없다. 시각은 눈을 의미한다. 눈은 보이는 것과 보는
존재가 만나, 관계를 이루어내는 곳이다. 하지만 그 보는 존재가 인간일 경우, 시간이나
거리 때문에 눈이 보지 못하거나 결코 볼 수 없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시각은 보는 사람을 포함하면서(그가 보기 때문에), 동시에 그를 배제하기도(같은 시각에
여러 곳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한다. 시각은, 비록 보는 사람에게 위협적인 경우라 하더라도,
보는 사람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가시적인 것과, 그 사람의 존재를 무시하는 비가시적인 것으로
구성된다. 무엇인가를-대양, 사막, 북극광 등-보았었더라면 하는 소망에는 깊은 존재론적
토대가 있다. 과거에 보았던 것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이른바 부재의 시각적 경험 역시,
시각에 대한 인간의 이런 양면성을 가진 인식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의
사라짐을 마주한다. 사라지는 것, 보이지 않게 되는 것, 그런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을 부인하게
되는 것, 우리 존재를 무시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을 이겨내기 위한 하나의 투쟁이 뒤이어 일어난다.
따라서 시각은 비가시적인 것 역시 실재한다는 믿음을 갖게 하고, 한번 본 것들이 공간이라는 복병에 의해
부재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영구히 맞서 보전하고 조합하고 정리하는, 내면적 눈을 기를 것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