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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러도 할말은 있어
Day_dreaming
2011. 12. 20. 04:12
그애에게 편지를 썼다. 짧고 예의바르며 형식적인 답장이었다.
서하에게
보내준 편지, 그리고 음악 잘 받았어.
그리고 나를 산이라고 불러줘 고마워.
해발 140쎈티미터도 안되는, 세상에서 제일 낮은 산이지만
내 속에 어떤 꽃이 피는지 나도 잘 살펴볼게.
그럼 잘 지내.
안녕.
'보내기' 단추를 누르기 전, 모니터 속 문장을 몇번이나 확인했다.
해야 할 말은 한 건지, 안해도 될 말을 쓴 건 아닌지 보고 또 봤다.
'꽃에 관한 얘기는 빨까?'
하지만 이미 아까운 문장을 많이 지운 뒤였다. '내가 아는 한 시인은 꽃이 피는 걸 '핀다'라고 안하고 '목숨을 터뜨린다'라고 했어.
근사하지?라는 구절도 엄청 넣고 싶었는데 가까스로 참았다. 누가 봐도 명백한 구애, 명백한 노력처럼 보이는 표현은 안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떤 여지 같은 것은 남기고 싶었다. 들키기위해 숨어 있는 '틀린 그림'처럼. 부정이 아닌 시치미가, 긍정이 아닌 너스레가, 들꽃처럼 곳곳에 심겨 있길 바랐다.
/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세 평짜리 방안에 앉아 아침을 지어먹고 그가 설거지를 할 동안 나는 차를 끓여내고 우리는 서로 말없이 홀짝거리며 몇 모금을 넘기다 창밖을 바라본다 말이 사그라들고 나의 시선은 창밖으로 그의 시선은 손바닥만한 액정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갑자기 등 뒤가 시려워 모포로 몸을 감싸고 두서없는 문장들을 두들겨내기 시작한다 부엌에서 새어나오는 대추차 냄새 아 빨래를 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 날씨는 또 왜 이모냥이지 주어진 한순간동안 최대의 딴짓을 한다 가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눈을 비벼본다 그래 우리가 지금 이 시간에 공간에 함께있지 그래 이것은 사실
일상을 영위하는 것 거창한 것 제쳐두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고단한 일이다 서서히 서로의 침묵에 익숙해져가고 잠깐의 사랑을 확인하고 때가 되면 밥을 차려먹고 불러오는 배를 누르며 산책을 간다 바람에 떠밀려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마음속 한켠에 슬슬 올라오는 이 불편하고도 못된 심정, 다시 떠올라 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도 안다 그는 나 때문에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낮시간에는 최대한 자세를 곧추세워 의자에 앉아있으려하며 담배를 태워보내는 개비수도 줄이고 걸음걸이도 신중히 소리를 내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끔 나를 부를 때 뭐하고 있니, 라고 물을 때 별 말없는 나에게 추궁하지않고 내버려둔다는 것도 잘 안다 천성이 못되고 기질적으로 예민해 곧죽어도 제때 솔직하지 못하고 나는 지금 그를 내곁에 두고 이렇게 또 딴짓을 한다 편지는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서 보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 경우 대부분 쓰고있는 상황자체가 훨씬 중요하게 여겨질 때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어와 문장사이에 팽팽한 긴장감대신 당장이라도 치맛폭으로 흘려들어가고 싶다는 구애를 서슴치않으면서도 막상 더이상 편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 생각했을 때 느껴지는 허탈감 박탈감 외로움 또한 함께 찾아드는 것이다.
서하에게
보내준 편지, 그리고 음악 잘 받았어.
그리고 나를 산이라고 불러줘 고마워.
해발 140쎈티미터도 안되는, 세상에서 제일 낮은 산이지만
내 속에 어떤 꽃이 피는지 나도 잘 살펴볼게.
그럼 잘 지내.
안녕.
'보내기' 단추를 누르기 전, 모니터 속 문장을 몇번이나 확인했다.
해야 할 말은 한 건지, 안해도 될 말을 쓴 건 아닌지 보고 또 봤다.
'꽃에 관한 얘기는 빨까?'
하지만 이미 아까운 문장을 많이 지운 뒤였다. '내가 아는 한 시인은 꽃이 피는 걸 '핀다'라고 안하고 '목숨을 터뜨린다'라고 했어.
근사하지?라는 구절도 엄청 넣고 싶었는데 가까스로 참았다. 누가 봐도 명백한 구애, 명백한 노력처럼 보이는 표현은 안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떤 여지 같은 것은 남기고 싶었다. 들키기위해 숨어 있는 '틀린 그림'처럼. 부정이 아닌 시치미가, 긍정이 아닌 너스레가, 들꽃처럼 곳곳에 심겨 있길 바랐다.
/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세 평짜리 방안에 앉아 아침을 지어먹고 그가 설거지를 할 동안 나는 차를 끓여내고 우리는 서로 말없이 홀짝거리며 몇 모금을 넘기다 창밖을 바라본다 말이 사그라들고 나의 시선은 창밖으로 그의 시선은 손바닥만한 액정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갑자기 등 뒤가 시려워 모포로 몸을 감싸고 두서없는 문장들을 두들겨내기 시작한다 부엌에서 새어나오는 대추차 냄새 아 빨래를 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 날씨는 또 왜 이모냥이지 주어진 한순간동안 최대의 딴짓을 한다 가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눈을 비벼본다 그래 우리가 지금 이 시간에 공간에 함께있지 그래 이것은 사실
일상을 영위하는 것 거창한 것 제쳐두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고단한 일이다 서서히 서로의 침묵에 익숙해져가고 잠깐의 사랑을 확인하고 때가 되면 밥을 차려먹고 불러오는 배를 누르며 산책을 간다 바람에 떠밀려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마음속 한켠에 슬슬 올라오는 이 불편하고도 못된 심정, 다시 떠올라 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도 안다 그는 나 때문에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낮시간에는 최대한 자세를 곧추세워 의자에 앉아있으려하며 담배를 태워보내는 개비수도 줄이고 걸음걸이도 신중히 소리를 내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끔 나를 부를 때 뭐하고 있니, 라고 물을 때 별 말없는 나에게 추궁하지않고 내버려둔다는 것도 잘 안다 천성이 못되고 기질적으로 예민해 곧죽어도 제때 솔직하지 못하고 나는 지금 그를 내곁에 두고 이렇게 또 딴짓을 한다 편지는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서 보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 경우 대부분 쓰고있는 상황자체가 훨씬 중요하게 여겨질 때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어와 문장사이에 팽팽한 긴장감대신 당장이라도 치맛폭으로 흘려들어가고 싶다는 구애를 서슴치않으면서도 막상 더이상 편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 생각했을 때 느껴지는 허탈감 박탈감 외로움 또한 함께 찾아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