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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속에서

Day_dreaming 2011. 11. 20. 21:18
오래전에 친구가 터너의 그림을 직접 보고 싶다 말한적이 있다 눈앞에 그득하게 내려앉은 안개 주변의 끈적하고 눅눅한 세월의 자국들이 붙어있는 고기잡이 배들. 8년 전, 터너라는 사람을 알지도 못한채로 우연히 테이트 모던에 갔다가 그의 그림을 본적이 있다. 무심코 지나쳤다가 후에 어떤 한 그림이 계속 생각나서 다시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바라봤다. 안개가 자욱했다. 당시 영국의 풍경이, 공기가 잠겨져있는건가, 싶었다. 이백년 전도 더 된 시간속 풍경을 바라본다. 터너는 캔버스와 함께 그 안개속 시간들에서 살았겠지.

일주일내내 안개가 이 도시를 내리 누르고 있다. 잠들기 전, 빼꼼히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어보면 6,70년대 영화속 한 장면처럼 가스등 아래 안개가 한줄기 떨어져 둥그런 빛을 뿜어낸다. 게다가 물가 근처에 사는지라 이슬내려앉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다. 새벽녘 눈을 떴을 때 해가 고개를 내밀틈을 주지 않는다. 모든것이 뿌옇게 자기몸을 감추고있다. 하얀방에 들어앉은 나도 애써뜬 눈을 다시 감는다. 아침이, 하루의 시작이 더디고 점점 힘들어진다.

오늘같은 일요일 아침, 모두가 느즈막히 움직이는 시간, 나는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일들로 부산하게 움직인다. 마음이 하루종일 잡히지 않는 나날들, 안절부절 못하고 청소며 설거지며 이제 딴짓을 할 것들도 마땅히 없다. 액정화면을 노려보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가 담배를 피웠다가 창문을 열었다가 다시 자리에 앉는다. 큰 조각을 끝내두고 무심코 내다 본 창밖은 여전히 안개속이다. 막연히 그리움이 또 밀려온다, 또. 서러움과 울분은 나의 18번이요, 그리움은 새로생긴 습관으로 늘러붙었다. 그런데 말이다, 오늘 오후의 그리움은 스스로 진절머리치는 그런 감정들과 뭔가 다르다. 보통때면 저 안개속 너머 누군가를 향해 당장이라도 뛰어들어갈 기세로 가슴이 요동치고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오늘은 아니다. 초를 하나 켜두고 여기서 기다리고 싶다. 안개가 걷히면 내가 그리워하는 얼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열심히 그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소리내어 팔을 뻗어 이름을 불러본다. 이 안개가 걷히면 그대들의 얼굴을 보여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