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길이 꽁꽁 얼어붙었다 겨울이라 의례 눈이 오고 칼바람이 불고 하는 것은 당연한데 아직도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타지라 느껴서인지 작은 날씨의 변화라도 주목할 수 밖에 없다 가을밤엔 거실 창으로 달이 뜨는 것을 지켜봤는데 며칠전 밤 부엌쪽으로 달이 옮겨간 것을 보고 계절이 시간이 그렇게 이동하고 있구나 새삼 느꼈다 매일매일이 다른 것 처럼 겨울이라는 계절도 그 안에 수많은 변화들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틀에 걸친 눈으로 기온이 많이 떨어지고 길이 얼어붙어서 당일치기 여행길에 오른 버스에서 모두들 우리가 제 시간에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도착지는 조금 더 추울거라며 미리 예고를 듣긴했어도 차창으로 멀어지는 나무들이 하얀옷을 입은채 말 그대로 사시나무 떨듯 그렇게 떨어져나가고 있었다 황량하고 드넓은 평지에 뾰족한 나무들위로 하얀 수염 하나씩들 걸치고 바들바들 떨며 서있는 것이다 보고만 있어도 추웠다
하얀숨들을 토해내며 버스에 내리니 작은 눈 알맹이들이 쉬지않고 내리치고 있었고 시야를 압도하는 고딕 양식의 철탑과 교회 건물이 도시의 시간성,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옆에 바로 자리한 최신 현대건축물이자 박물관을 방문하기위해 3시간 좀 넘는 시간을 버스를 타고 온 것이다 물론 국경을 넘어서. 가는 버스 안에서 박물관에서 보게 될 작가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선생의 센스있는 시간 사용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닥 정보가 없었던 나로서 매우 도움이 되었다 70세 먹은 데이비드 호크니. 야자수와 뜨거운 태양아래 거대한 스튜디오를 지어놓고 작업을 하던 그가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서 차츰 자신의 고향으로 옮겨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유럽의 겨울은 어딜가나 고약하지만 그의 고향인 요크셔도 만만찮은 곳임엔 틀림없어 보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그 시점 가장 찬 바람이 몰아치는 길 한 복판에 캔버스를 세워두고 한동안 떠나있던 고향의 풍경을 다시 들여다보고 화폭에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같은 크기의 여러개 캔버스를 거대한 크기로 세워두고 작업을 이어갔다 여섯개, 열 두개, 열 여덟개 이런식으로 캔버스의 수를 늘려갔고 최종 완성된 작품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그림, 풍경이었다
다큐멘터리가 거의 끝나갈 즈음 전시장에 도착했고 입구부터 그의 전시를 알리는 사인이 엄청난 크기로 걸려있었다 전시 제목도 A Bigger Picture 이니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스케일에 압도당할 수 밖에 없었다 입구부터 중앙 통로까지 걸려있는 그림들은 대게 2차원, 평면적 드로잉과 유화들이었다 그러다 안쪽으로 안쪽으로 들어갈 수록 분절된 패널들이 여러개 모여 거대한 하나의 풍광을 연출했다 그림속에 드러난 공간안으로 깊숙히 발걸음을 들여놓은듯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만약 그가 하나의 패널안에 그 자신이 봤던 풍광을 옮겨놓았더라면 어땠을까, 내 생각에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욕심'처럼 보였을 것 같다 캔버스에 풍광을 가둬놓는 방식이 아니라 그는 그림 앞에서 사람들에게 입구를 제시하는 그 안으로 손짓하는 일종의 '초대'의 그림을 그린 것이다 하나의 캔버스를 소유하여 그 안의 풍광을 잡아 거둬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화폭안에 담긴 풍광이, 그림 자체가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같은 장소를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기록한 비디오 역시 아름다웠고 매혹적이었다 마치 우리가 매일 같은 길을 걷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봤을 때 나무가지, 잎사귀의 모습을 보고 문득 시간을, 계절을, 현재를 인식하게 되는 것 처럼 그 순간 누군가를 어떤 시간을 다시 불러들이는 마법의 열쇠가 그 안에 있었다 그는 점점 더 멀리 멀리 보면서도 더 깊이 작은 순간들을 수집하는 작업들을 이어나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노년의 작가가 일상을 벗어나 자연으로 회귀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관조적인 태도로 자신의 세계를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의 입장을 선택하고 있었다 작은것들이 모여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림 그 자체의 크기가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그의 눈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