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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그만큼

Day_dreaming 2013. 8. 2. 05:02

멀쩡히 자다가도 뭔 생각으로부터 사로잡히면 일단 저지르고 본다 언젠가부터 아니 원래부터 그랬던가 그런것을 용기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즉흥적이고 별생각 없이 했다기엔 사실 마음 한 켠에서 나에게 계속 외치고 있던것이 행동으로 탈바꿈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제 저녁 할배선생에게 초대에 응하겠다고 답장을 써버린 것이다 예상대로 다음날 아침 후회가 밀려왔고 막상 만난다한들 무슨 이야기를 해야하나 혼자 시뮬레이션을 해가며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이제와서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취소하기엔 스스로 좀 꺼림직하고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나 싶어서 못난짓 그만하고 그냥 가보자 하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 눈 뜨자마자 집에서부터 그 집까지 가는 길을 몇 번이나 지도로 확인 또 확인을 하고 약속시간 15분 정도에 미리 도착하는 것을 계획으로 집을 나섰다 서쪽 끝에 사는 내가 동쪽 끝에 사시는 선생댁까지는 약 45분 정도 걸린다는 구글맵스에 안내에 따라 시내 중심가에서 전차를 바꿔타기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제시간에 와야 할 전차는 20분을 기다려도 오지않고 그 때부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러다 가까스로 도착하거나 늦을 수 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5분이 지났을 무렵 기다리던 차를 탔다 주소를 찾아 동네 안쪽으로 들어가다보니 어딘가 눈에 익숙한 느낌이 났다 생각해보니 2년 전 쯤 처음 살던 동네에서 이 동네까지 걸었던 적이 있다 약 1시간 반 정도 걸렸던 기억도 났다 주소를 재차 확인하고 문패에 선생님 이름을 보고나서야 안심했다 약속시간까지 7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정시에 맞춰 전화를 걸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숨을 돌렸다 꽤 한적하고 아름다운 인상을 주는 동네였다.


1시 정각,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하는 순간 선생은 바로 내 이름을 부르며 어디냐고 물었다 문앞이라고 했더니 바로 내려가겠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문이 덜커덩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그제서야 묘한 안심이 들었다 사무실이자 집인 장소로 나를 안내했다 컴컴하고 높은 천장에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저 멀리서 나를 보더니 뛰어내려왔는데 벌써 11살이나 먹은 노익장이었다 선생은 오늘도 위아래 검은 수트를 차려입고 멜빵을 맨채 커다란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집을 구경시켜주었다 100년 전 쯤 특수아동들을 위한 학교였던 건물을 25년 쯤 사들여 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보니 구조가 좀 특이하다 싶었는데 지나치게 커다란 창문과 높은 천장을 조금씩 손수 고쳐가며 꽤 근사한 공간으로 만들어놓았다 부인과 본인의 작업실이 각각 양끝에 있고 가운데 넓직한 거실이자 주방이 있었다 나를 주방으로 안내해 커피를 내주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보다 얼굴이 훨씬 좋아보인다고 했더니 아마도 그 때 꽤 피곤해서 그랬었나보다, 라고 말했다 게다가 졸업식 날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를 물었더니 내 예상대로 노모 병수발을 하러 어디도 갈 수 없었다고 덧붙혔다 연세가 86이라 몸이 쇠약한 것은 고사하고 하루종일 혼자 지내다보니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지고 잠도 잘 못 주무시고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심해져 괴로워하는 중이라고 했다 내가 그 심정을 잘 알겠다고 고개를 막 끄덕이니 처음엔 웃더니 웃음기가 가신 후 그러니까 너도 스스로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난데없이 가족과의 관계는 어떤지 애인과는 여전히 잘 지내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 분에게 한 적이 있었나? 라고 떠올려보면 했던 것 같기도하고 한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한데 생각나는 대로, 지나치지않을정도로만 이야기했다 말인 즉슨, 상대가 듣기에 부담스럽지않게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헌데 이 선생님은 학기중에도 만날 때 마다 다른 선생들과 달리 개인적인 혹은 아주 일상적인 질문을 자주하는 편이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말없이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멍하니 있으면 쉬는시간에 구석으로 끌고가 이런저런 코치를 해준다든지 시내 어느 서점에 가서 네 책을 소개하라든지 학교에 초대된 게스트 아티스트에게 따로 꼭 시간을 내서 만나보라고 연결을 시켜둔다든지 한마디로 좀 아빠같은 역할을 하려는 행동을 종종 발견했다 어쩌다 부모님 나이를 묻길래 대답해주었더니 우리 아빠보다 한 살 어리고 엄마보다는 한 살 많은 57년생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러면서 껄껄 웃으시길래 뭔가 이제부터 할배라고 생각하면 안되겠다, 라는 생각을 했고 친근감도 느껴진 게 사실이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돌아갈 예정이었다가 샐러드를 잔뜩 만들고 커다란 터키식 빵을 잘라서 테이블에 놓으시더니 점심을 먹자고 했다 사실 좀 당황스럽긴 했다만 어느새 그의 대화에 끌려가는 것이 퍽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잠자코 먹기 시작했다 선생은 종종 나에게 하는 이야기들-너무 지나치게 너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라, 외출을 자주해라, 자전거를 좀 타보려고 시도해라-을 레파토리마냥 늘어놓으시다가 오늘은 이런 이야기로 마무리했다 네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든 그 사람이 미래에까지 동일한 인물이든간에 너 자신을 믿어야 상대도 믿을 수 있다 그러니 이 시간을 잘 마주하고 보내야만 미래라는 시간도 존재할 것이다 각자 의견이 다를 수는 있지만 공통의 관심사가 아주 없는 것은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힘들다 그리고 만약 같이 살게 되더라도 각자 공간을 반드시 갖을 것 서로의 시간과 공간을 인정해줘야 같이 살 수 있다 우리는 자식은 없지만 이 강아지가 곁에있고 이렇게 마주앉아 식사를 하는 테이블을 함께 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식사를 마치고 동네를 한바퀴 둘러보면서 근처에 초등학교 공원 길에 앉아 떠드는 아이들 강아지들 책 읽는 사람들 흔들리는 나무들을 말없이 보고 함께 걸었다 그 순간 내가 누군가와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새삼스레 놀라웠다 천천히 천천히 걸으면서 느릿한 걸음에 발을 맞췄다 나도 선생님 나이가 되었을 때 누군가와 이렇게 함께 걸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다,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분처럼 상대에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는 자신은 없다만 적어도 같이 걷고 들어줄 귀가 깨어있기를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