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후
어제 하루종일 작정하고 비포 시리즈를 봤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대사가 굉장히 많았었던 것, 시리즈 중 선셋을 가장 좋아하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Before'이라는 말은 사건이 종료된 시점에서 그 전까지의 한정된 시간을 가리키는 것, 즉 현재에서 회상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 보이는데 영화속 시간에서는 이야기의 종결시점을 가리킨다. 무엇보다 9년이라는 두 번의 간격을 두고 만나고 헤어지고 재회하고 함께하는 평범해보이지만 매번 선택에 의해 그 다음이 새롭게 구성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의 속성은 우리에게 익숙한 패턴일 것이다. 문제는 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두 사람, 이 두 사람의 삶의 시간은 엄청나게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내가 두 번째 이야기인 비포 선셋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시작했으나 그 다음을 상상할 수 밖에 없던 것이 다른 현실에서 새롭게 재회하고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가진 두 사람이 놓인 상태 때문이다. 공교롭게 그들의 나이는 내 현재의 나이와 같고, 일을 한창 하고 있지만 과거의 누군가의 그림자가 여전히 붙어있는 상황이 동일하다. 다시 재회했을 때, 그들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살면서 벌어진 이야기들을 늘어놓지만 그 전에도 지금도 각자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있다. 이 경우, 단지 과거의 사람을 과거라고 치부할 수 없고 현재의 내게 어떤 존재인지 명확하게 상정해두지 않으면 시간은 흘러가고 나이는 먹었어도 여전히 서로 처음 만났던 20대에서 멈춰버린 기억을 붙잡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전과 후가 명백히 나뉘어지는 것은 사실 따지고보면 그리 많지 않다. 지금 내 몸속에도 여러 시간대가 동시에 새겨져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