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너를 만났을 때
최근에 나무 십자가가 세워진, 한겨울에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인의 무덤이 야영지의 끝자락에 있었다. 그녀의 운명에 관한 질문을 받은 올라우크는 “그녀는 아기를 원했다.”라고만 대답했다. 이러한 절제된 감정표현은 초기 영국 탐험가들을 당혹스럽고 두렵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이뉴잇은 야만적이고 인간미가 결여된 냉담한 사람들이었다. “안녕”, “잘가” 혹은 “감사합니다”와 같은 말이 없는 언어, 또는 노인을 죽게 내버려 두거나 방금 죽은 사람의 시체를 개가 파내서 먹는 걸 그대로 놔두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영국인들은 북극에서는 다른 삶의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참을성 많은 이뉴잇은 굶주림에 웃으며, 숙명론적인 냉담함으로 슬픔을 맞이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 외에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과 결핍은 매일 그들과 함께한다. 야영지의 한 늙은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어야 했던 마지막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이 멈춰진’ 1930년대 말의 일이었다. 모든 동물들이 사라져서 그녀의 대가족 중 한 남자가 죽기를 자청했다. “누군가가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는 죽어야 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사건 이후로, 무리의 여성들은 길게 딴 머리를 잘라 친족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을 남들에게 알렸다.
/ 웨이드 데이비스, [시간 밖의 문명] 중에서
친구와 우스게소리로 새로운 동네로 이사온 후에는 사람들로부터 '니하오'라는 식의 비하하는 인사말을 듣지 않게되어 살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며칠 전, 다시 이곳에 돌아와서 산책겸 긴 길을 걷게 된 날 뜻밖의 일이 있었다. 사거리, 자동차와 자전거,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이 혼제한 상황에서 자전거를 타고가고있던 한 중국인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니하오. 당신 중국 사람입니까?" 나는 중국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지만, 정황상 아저씨가 나에게 중국사람인 줄 알고 말을 걸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끄러운 길 한 복판에서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나는 한국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미안합니다. 중국사람인 줄 알고, 길을 물어보려고 했습니다."라고 영어로 다시 대답했다. 그리고는 미안하다는 말을 연거푸 하더니, 신호가 바뀌자마자 큰 짐을 실은 작은 자전거를 끌고 사라졌다.
몇 번 상상한 적이 있었다. 진짜 중국사람들을 향해, '니하오'라고 빈정거리는 외국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어떤 심정일까. 본인들도 비웃음과 경멸의 시선이라는 것으로 해석할까,하고. 그런데 나는 예상치못하게 정말 중국 아저씨로부터 인사를 건네받고나니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에 잠시 휩싸였다. 다른 것 보다 제차 미안하다고 깍듯하게 말을 건네는 그 아저씨의 표정을 잊기 힘들었다. 사실 단순하게 생각해봤을 때, 그 아저씨는 그저 가던 길에 낯빛이 비슷한 나에게 길을 물어봤을 뿐이고 나는 아저씨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대답을 해줄 수 없는 것 뿐인데, 그 잠시잠깐의 순간 나는 죄의식과 동정심, 허탈함과 쓴웃음이 동시에 발생했다. 대부분의 서양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인사풍습-길거리나 엘리베이터 등 공공장소에서 낯선 사람과 마주했을 때 거리낌없이 '하이'나 '헬로우'를 뱉는 것-에서 느끼는 이질감과는 또 다른 것이다. 보다 솔직하게 말해서, 타인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 자체의 생경함을 견뎌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배타적인 시선을 가지고 이방인으로서의 나의 모습을 보고 말을 거는 것이라 지례짐작하는 것은 아닐까. 이 모든 것에 대해 나는 왜 긍정도, 부정도 할 수없는 것인가. 인사 한 마디, 찰나의 눈빛교환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가 태반이다. 그래서 낯선 장소에 갈 때면 평소에 안쓰던 선글래스를 꺼내쓰고, 경주마들에게 억지로 덧씌운 시선 차단 가리개같은 것을 두른듯 앞만 보고 걷는다. 그렇게 계속 앞만 보고 가다보면 때때로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잊을 때가 있다. 그래서 언제 어디에서부터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어디이며, 내가 얼마나 더 가야 할 지 모르겠는 상황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