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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밤

Day_dreaming 2012. 2. 10. 20:24
얼마전 나의 룸메이트 부모로부터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지난 3일동안 도무지 연락이 되질 않아 걱정스럽다고, 혹시 네가 알고있는게 있냐고. 처음 그 메일을 읽고나서는 정말 한 부모 하시는구나, 하고 웃으며 넘겼다. 그리고 최대한 친절하고 정확한 사실을 적어서 보냈다. 그녀는 집에 잘있고, 오늘밤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얼굴을 보는대로 이 메시지를 전하겠다. 걱정마시라고.

함께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이 넘어가는 동안, 그녀의 고향으로부터 주마다 적어도 세 번 이상의 소포가 배달되어오곤 한다. 90%이상, 내가 받아 전달하는 식인데, 갖가지 음식과 향신료들, 옷가지, 그 나라말로 된 신문들, 어딘가에나 적어놓은적도 있지만 쓰다남은 주방세제를 테잎으로 감아 그것까지 보내셨다. 대단하고, 참 대단한 부모님들이라 여길 수 밖에 없다. 그정도 하는 부모님이니 당연히 3일동안 연락안된 딸 때문에 전전긍긍 하고 계실 모습은 너무 자연스럽게 여겨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아이의 삶을 쭉 들어보면, 영국와 아일랜드에서 각각 2년씩 가족과 떨어져 산 경험도 있고, 무엇보다 얘는 군대도 다녀왔다. 하하. 매일 아침 망태 할배마냥 백팩을 짊어매고 등산화를 신고 하늘색 솜잠바를 입고 나가는 뒷태를 보면 너무 그렇고 그런 공주과는 아닌게 분명한데, 어딘가 모르게 늘 어깨고 축 쳐져있고 슬프고 아련한 표정도 종종 볼 수 있다.

결국 소식을 전하고 자초지종을 들어본 결과, 이 학교에 대한 실망감, 특히나 '차가운' 사람들 사이에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며 짐을 싸서 갈 생각까지 했다고한다. 며칠동안 밤마다 울고 길을 걸으면서 한편으로 포기하고 또 한편으로 밀려드는 모멸감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코를 연신 풀어재끼며 손을 벌벌 떨어댔다. 그 날 밤 늦게까지 알아들을 수 없는 그애네 말이 울려펴지는 것을 들었다. 분풀이하듯 부모님께, 남자친구에게 하소연을 한바탕 하고나더니 다음 날 한결 표정이 밝아져있었다.

이 도시에 한 달에 한 번씩, 큰 규모의 벼룩시장이 열리는데 나의 룸메이트는 그 시장에서 스케이트를 사들였다. 처음 눈이 퐁퐁 쏟아지던 날도 아이마냥 좋아했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태어나 눈을 실제로 처음 봤다며 직접 눈을 밟아보겠다고 하늘색 솜잠바를 입고 아무도없는 길을 계속 걸었던 뒷모습을 나는 지켜봤다.

유독 아침 햇살이 밝은 오늘, 그 애는 또 나에게 말을 시작하더니 종달새마냥 떠든다. 어제밤, 한밤중에 다리 건너에 있는 얼음판에 다녀왔다고, 누가 있었어? 아니 나 혼자 있었어. 뭐했어? 스케이트 탔어. 스케이트? 응, 아무도 없어서 좋던데. 그렇다 얘는 한밤중에 얼어버린 이 도시 한 구석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하얀숨을 내뿜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하얀밤, 내뿜어진 하얀숨에 무엇을 털어두고 왔을까. 이전 룸메이트도 밤마다 공원에 가서 꽃을 주어오곤 했었다. 이방인의 여자들에게 이 도시의 밤은, 잠시동안 숨통을 열어준다. 그리고 비밀을 슬픔을 속삭이고 걷고 뛰고 꽃을 주어오고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한바탕 끝나면 또 아무렇지도 않은듯 집안으로 몸을 감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