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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 밤

Day_dreaming 2015. 12. 11. 11:12

"이 길을 쭉 따라서 무주까지 가다보면 마이산이 나올 거다. 그 산에 들렀다 갈까?"

"마의 산? 토마스 만?

그러자 아버지는 헛헛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의 산이 아니고 마이산이라고, 진안에 있는 산 이름이다. 생긴 모양이 말 귀를 닮았다고 해서 말 마, 귀 이, 마이산이다. 거기 가면 대단한게 있지."

"말 마, 귀 이", 속으로 한자를 따라 되뇌던 정민이 물었다.

"뭐가 있는데?"

"잔돌을 쌓아서 만든, 엄청나게 큰 돌탑들이 여든 개 정도 있지.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더 놀라운 건?"

"단 한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그 탑들을 모두 쌓았다는 것이지."

"한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여든 개가 넘는, 그것도 엄청나게 큰 돌탑들을 쌓았다는 말이야?"

"그렇지. 한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아마도 낮이었다면 그렇게 쌓지 못했을 것이다."

"뭐가 그래요? 낮에는 못 쌓는 탑을 밤이라고 어떻게 혼자서 다 쌓아?"

"왜 안 되겠니?"

아버지는 정민을 돌아봤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도 있지 않느냐."

그 말에 정민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긴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듯이 정민은 깔깔거렸다. 봄의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몇 번 혼자서 피식거리거나 씁쓸하게 미소를 지은 적은 있었지만, 그렇게 큰 소리로 웃어버린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해서 정민은 오히려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아니, 아버님! 그 만리장성은 말이에요...."

"그 만리장성은?"

"그건 운우지정을 뜻하는 거죠."

양 볼을 살짝 붉히며 정민이 말했다. 국어시간에 배운 대로, 구름과 비의 사랑. 그떄까지 정민은 그런 사랑을 알지 못했으므로, 깔깔거리며 터져나오던 웃음이 갑자기 멎어 좀 난감했다. 원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더 세차게 깔깔거릴 작정이었는데, 막상 말하고 나니 쑥쓰러워졌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의 눈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자상한 외괴의사의 눈매로 돌아와 있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운우지정이라는 게 바로 사랑이 아니겠냐? 그 동안 마이산에는 한 서너 번 가본 것 같구나. 그런데 거기 가서 그 돌탑들을 볼 때마다 사랑이라는 걸 생각하게 돼. 누군가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많은 돌탑을 쌓을 수 있다면 그건 오직 사랑 때문이겠지.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그 돌탑들을 쌓은 사람은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세상을 갈망했다고 하더구나. 그런 갈망이 있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겠지.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다 그런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적어도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모두에게 사랑받을 생각도 자격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납득한지 오래다. 때문에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돌은 오로지 나와 너의 시간들 뿐이다.  그 밤을 잘 견디어 낮을 맞이하는 것 조차 우리의 몫이니까. 그런데 문득 그 밤의 한 가운데 너는 없고 나만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