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ap)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
악기는 먼 곳, 존재하지 않는 곳, 존재하지 않지만 뚜렷이 보이는 곳, 뚜렷이 보이지만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곳,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뚜렷이 존재하는 곳, 부재가 곧 존재인 곳을 향하여 인간을 몰고 나간다. 그래서 모든 악기는 불우하고, 모든 불우한 악기는 혁명적이다. 악기는 부재하는 것들을 존재라고 우리고 존재하는 것들을 부재라고 우긴다. 악기는 무기의 질서를 넘어서고, 모든 무기는 악기를 동경한다. 자는 그 무기와 악기 사이에 처해 있다.
무기가 강하고 악기가 약한 것이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무기와 악기와 자는 다 똑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다 인간의 마음과 더불어 불안정한 것이다. 불우한 것들은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자는 이 흔들리는 불우를 거부하면서 세상은 단정한 곳 일 수도 있다고 말하려 한다. 인간은 자가 재단해 주는 세상의 평화와 질서를 동경하면서, 또 그 자의 눈금의 세계에 저항한다. 그래서 역사의 비애와 엎치락 뒤치락은 한도 없고 끝도 없다.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장구와 자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의 역사는 6세기에 이미 탄생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땅속에 무기와 악기와 자가 다들어 있었다. 그들은 싸우고 춤추고 노래하며 자로 재었다. 그때 이미 삶의 한 원형은 정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는 이 원형의 연주이거나 확대이거나 반복은 아닐 것인가. 땅속에서 나온 옛 악기와 옛 자를 들여다볼 때 그때와 지금 사이에 끼여 있는 1천 4백여 년의 시간은 소멸하는 것 같다.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 뒤로도 간다. 앞으로가는 시간과 뒤로 가는 시간 사이에 우리는 끼여 있다. 그것이 삶의 순간들이다. 모순에 찬 삶은 그래서 여전히 신비하다.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 김훈,
사무치다, 이 계절의 온도가 그렇다. 바람이 색과 마음을 바꿔내고 시간은 점점 앞으로만 향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마음의 언저리에 계속 얹히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무어라 설명하기 참 어려운 계절에 살고 있다. 완연하다, 무언가를 완성해나가는 시간들 속에서 추수와 타작 끝에 덩그라니 남겨진 것들이 서걱서걱 내 마음에 와서 부딪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