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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플라키아

Day_dreaming 2012. 10. 13. 20:30

간밤에 하늘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네 근처 신축공사 현장 옥상에 매달려있는 네온사인이 늘 빛을 껌뻑이지만 그것과는 아주 다른 강력한 번쩍임이었다 이어서 우르릉 쾅쾅 연이어 내리치는 소리가 나더니 거세게 비가 밀려왔다 밤이 오는 것을 퍽 두려워했던 지난 시간들과 다르게 나는 요즘 아주 캄캄한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존재를 드러내지않고 숨죽여있는 그 시간, 형상을 기다리는 것이다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포개졌거나 아예 조각나버려 검은 진공관속에 딱 갇힌 모습처럼 말이다


부엌에서 가끔 건너편 집의 부엌을 훔쳐보는데 그 집에는 세 명의 가족이 살고있다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부부와 두세살배기 아이 남편은 퍽 다정한 것 같아 보이는데 먼저번 저녁에는 설거지하고 있는 부인의 등 뒤에 머리를 살포시 포개더니 급기야 키스가 시작되고 수도꼭지는 잠궈지고 불은 꺼졌다 그들도 그렇게 모습을 감췄다


비는 정오를 넘긴 이 시간까지 계속 내린다 이것이 이 도시의 일상적 기후이다 모든 표면들이 축축하게 젖어 색이 바랜 벽돌은 검게 나뭇잎들은 입을 뻐끔거리며 줄기차게 비를 빨아들인다 내 방으로 연결된 베란다에는 늘 비둘기 두어마리가 찾아와 시끄럽게 굴어서 늘 신경을 긁어놓는데 오늘은 조용히 지들 자리에 앉아서 서로의 부리를 킁킁거리며 애무를 해대기 시작했다 담배를 몇 모금 피우다가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저들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봤다 한 쌍의 비둘기가 좁다란 굴뚝사이에 비를 피하고 서로의 몸을 더듬고 있는 것이다 쟤들은 춥지도 않나, 싶으면서 그렇게 싫어하는 비둘기를 계속 보고있었다 네들은 맨날 찾아오는 그애들이냐 아니면 오늘 처음 여기왔냐, 묻고 싶어졌다


지난 한 주동안 하루도 거르지않고 외출을 했다 초반 이틀은 뮤지엄에가서 시간을 보내고 나머지 삼일은 학교에 갔다 최고령자 선생님이 진행하시는 영화강의를 듣고 깐깐하기 소문난 인기 선생 한 분을 만나고 그나마 내가 좀 마음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선생님과 만나 미팅을 했다 그리고 욕심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기획서를 제출해 통과된 프로젝트 회의에도 다녀왔다 장황한 설명을 마치고 나자 선생님은 빙그레 웃었지만 학교에 가면 그나마 반갑게 인사하는 친구가 마침 옆자리에 앉아있던 터라 그 아이한테 물었다 내가 뭔 말하는지 이해가냐 그랬더니 왈 아니 잘 모르겠어 근데 아름다워 지금부터 찾아보면 되지 뭐 네가 뭐 하고 싶어하는지 세상에나 나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었다 결국 또 나혼자 헷소리를 짓거리고 남들을 다 이해시킬 수 있을거라는 오만함을 한곳에 숨긴채 그렇게 앉아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구겨진 마음사이로 비가 쳐들어와 더 축축해졌다 도대체 내가 남들에게 공감시킬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가 더는 도망칠 굴도 없다 지겨워지는게 제일 무서운건데 갑자기 모든게 딱 실증이 났다


사실 뭔가를 매일 생각하며 살고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두서없고 근거없는 지식욕과 호기심 갈구 시간이 지나면 뭔가가 다 해결될 수 있을거라는 얄팍한 희망 자신감 따위는 없으면서 뭔가를 해대고있는 불안감의 정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때 가만히 누워서 천장이라도 보고있으라고 잠시 쉬라고 말해주는 엄마말을 한 번도 실행해보지 못하는 이 소심함 남들의 처절한 인생을 보면서 희망을 얻는 잠깐의 순간 퍽 저질스럽게 느껴진다 아무곳도 너머에 없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없는 상태를 갈구하는 백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