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30

밑줄긋기)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 편지 11

어제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그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미움을 지워내고 희망을 지워내고 매일 밤 그의 문에 당도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러나 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거나 무심한 무덤가의 집풀 같은 열쇠 구멍 사이로 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 돌아서면 그 뿐, 문 안에는 그가 잠들어 있고 문 밖에는 내가 오래 서 있으므로 말없는 어둠이 걸어나와 싸리꽃 울타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어디선가 모든 길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처음으로 하늘에게 술 한잔 권했습니다 하늘이 내게도 술 한잔 권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 때 하늘에서 술비가 내렸습니다 술비 술술 내려 술강 이루니 아뿔사,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아마 내일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아마..

TEXT 2011.05.09

밑줄긋기)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네가 들어갈 때 나는 나오고 나는 도시로 들어오고 너는 도시에서 나간다 너는 누구인가 내가 나올 때 들어가는 내가 들어올 때 나가는 너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 도시에서 태어났지, 모든 도시의 어머니라는 그 도시에서 도시의 역전 앞에서 나는 태어났는데 너는 그때 죽었지 나는 자랐는데 너는 먼지가 되어 도시의 강변을 떠돌았지 그리고 그날이었어 전철문이 열리면서 네가 나오잖아 날 바라보지도 않고 나는 전철문을 나서면서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너는 누구인가 너는 산청역의 코스모스 너는 바빌론의 커다란 성 앞에서 예멘에서 온 향을 팔던 외눈박이 할배 너는 중세의 젖국을 파는 소래포구였고 너는 말을 몰면서 아이를 유괴하던 마왕이었고 너는 오목눈이였고 너는 근대 식민지의 섬에서 이제 막 산체스라는 ..

TEXT 2011.04.16

밑줄긋기) 위대한 기대

언제 비출까요? 햇빛은 내 마음의 연못에 언제 필까요? 연꽃은 내 손가락 끝에 언제 폭발할까요? 메마른 지식의 바위는 흘러넘치는 사랑의 물줄기에 순종하면서 언제 올까요? 지상에 꽃피는 날은 에고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손에 손잡고 노래하고 춤추며 완벽한 조화 속에 살게 되는 멜로디에 함몰된 침묵에서 비롯되는 하늘 가득 충만한 평화 그 따뜻함 속에서 언제 살게 될까요? 우리들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아무런 공포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힘껏 껴안고서. 생각의 화살에 내려앉은 시처럼 내 손에도 떨어져야만 하리 달과 별들은. 그 신선한 빛은 타올라 밝게 빛나야만 하리 세상의 모든 거리마다 그리고 새 얼굴은 꽃피어야만 하리. 발기발기 찢겨버린 종교의 거짓 살갗으로 세상은 돌아가야만 하리 대자연의 사원처럼. 세상의 문지방..

TEXT 2011.04.06

누가 퍼거스와 함께 가는가

누가 지금 퍼거스와 함께 깊은 숲 얽힌 그림자들을 뚫고 가서 편편한 해변에서 춤을 추는가? 젊은이여, 그대의 붉은 이마를 들게나, 아가씨여, 그 부드러운 눈을 치껴뜨게나, 그리하여 희망을 생각하고 더 이상 두려워 말게나. 더 이상 고개를 돌려 사랑의 쓰라린 알 수 없음에 대해 깊이 생각지 말게 왜냐하면 퍼거스가 단단한 마차를 움직이고, 흐릿한 바다의 하얀 젖가슴과 헝클어져 헤매는 저 모든 별들을 통제하고 있으니.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좋잖아 좋아 그런데 엄마 누가 식어빠진 죽 취급 당할 줄 알고 시작하느냐고 당연히 아니란 걸 알지요 사실 알면서도 발이 가드만요 이건 중력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거냐고 그저 내 손에 N이 쥐어있어서 S를 만났을 뿐인거냐고 듣고보니 그것도 맞구먼

TEXT 2011.03.21

밑줄긋기) 기억은 몰래 쌓인다

매일 밤 나는 눈을 감지. 그리고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았네. 어떤 소리가 새어 나갈지 알 수 없었네. 나는 놀러 다녔어. 나는 취미도 개성도 없지. 매일 밤 나는 눈을 감으면서 세상이 감기는 걸 느끼지. 이렇게 간단히 세상이 바뀌는걸 뭐, 하고 중얼거리네. 가로수들이 엎어지고, 길은 혀처럼 도르르 말렸어. 육중한 동물들이 희귀한 교미 장면을 보여주곤 했어도 에로틱해지지 않았네. 뿌옇게 흙먼지만 일었지. 나는 다른 종에게 취미를 느낀 적이 없어. 눈을 감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느끼는 건 아니야. 애들이 조용히 눈싸움을 했네. 눈은 포장일 뿐이고, 언제나 싸움은 돌멩이를 감추고 있는 법이지. 볼때기가 뻘겋게 부어 터질 듯했어. 새들이 흰 눈밭에 콕,콕,콕, 부리를 찍었지만 내리는 눈은 금세 구멍을 메우네...

TEXT 2011.02.14

아직은 Jeszcze

여기저기 납땜 자국이 무성한 낡은 기차에 올라탄 채 '이름들'이 이 나라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어디로 갈지 언제 내릴지 묻지 마라, 대답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나도 답을 모르니까. 나탄이란 이름은 주먹으로 벽을 치고, 아이작이란 이름은 광란의 노래를 부르며, 사라란 이름은 갈증으로 죽을 지경인 아론이란 이름을 위해 물 달라고 고함을 지른다.(6) 다비드란 이름이여, 열차가 달릴 때 뛰어내리지 마라. 넌 패배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이름, 집 없는 이름, 이 나라에서 짊어지고 다니기엔 너무도 버거운 이름이기에. 아들에게 슬라브의 이름을 명명할지어라. 여기서는 머리카락 개수를 낱낱이 세니까.(7) 여기서는 이름과 눈꺼풀 모양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니까. 열차가 달릴 때 뛰어내리지 ..

TEXT 2010.09.29

If you feel, she will come.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속에 든 빙산이 제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게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 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초 오가피 다래눈 저너기 떡취 얼러지나물 함께 따뜻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 한 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고정희 에서

TEXT 2010.09.24

scrap) 나는 기억하고 있다

길이 없었다 분명 길이 있었는데 뛰고 뛰던 길이 있었는데 길 끊어진 시간 속에서 어둠만이 들끓고 있었다 (셔터가 내려진 상가 보이지 않는 발자국들만 저벅거리는 불 꺼진 어둠의 상가) 그 십여 년 고요히 끝나가고 있다 아직은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길이 있었음을 뛰고 뛰던 길이 있었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 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 (2010.01.신작)

TEXT 2010.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