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5

밑줄긋기) 박하

"무바탈리, 정말 그런 이야기가 전해옵니까, 여기에?" 프롬 교수가 무바탈리에게 물었다. "촌로들은 다 그렇게 얘기하지요. 촌로들의 할아버지들도 그렇게 얘기를 했을 것이 틀림없고요. 이곳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오지라서, 한번 이야기가 생겨나면 저 바위들처럼 완강하게 버티지요. 잊히지 않으려고 사람의 혀로 들어가요. 그러면 혀가 물레가 되어 기억들을 지어내는 건데, 기억들을 베틀 위에 올려놓고 키림(kilim, 양탄자)의 무한한 문양을 짜내는 것처럼 이야기는 만들어지는 거고요. 기억은 사라지고 문양만 남지요. 그러니 기억은 이야기가 생겨나면 사실 사라지는 겁니다. 잊혀지는 거지요. 그러니 이 일화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 허수경, 박하 (일일연재 60회) 중에서 아우, 아우, 아우 아..

TEXT 2011.07.09

밑줄긋기)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네가 들어갈 때 나는 나오고 나는 도시로 들어오고 너는 도시에서 나간다 너는 누구인가 내가 나올 때 들어가는 내가 들어올 때 나가는 너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 도시에서 태어났지, 모든 도시의 어머니라는 그 도시에서 도시의 역전 앞에서 나는 태어났는데 너는 그때 죽었지 나는 자랐는데 너는 먼지가 되어 도시의 강변을 떠돌았지 그리고 그날이었어 전철문이 열리면서 네가 나오잖아 날 바라보지도 않고 나는 전철문을 나서면서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너는 누구인가 너는 산청역의 코스모스 너는 바빌론의 커다란 성 앞에서 예멘에서 온 향을 팔던 외눈박이 할배 너는 중세의 젖국을 파는 소래포구였고 너는 말을 몰면서 아이를 유괴하던 마왕이었고 너는 오목눈이였고 너는 근대 식민지의 섬에서 이제 막 산체스라는 ..

TEXT 2011.04.16

scrap) 글쓰기, 라는 것의 시작

경제 문서나 행정 문서를 쓴 서시관들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문서 말미에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든 도장을 찍어두었다. 그러나 고대 동방인들이 남긴 문학적인 형태의 글에는 누구나 자신의 서명을 적어놓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서시시들을 쓴 이들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한 인간이 문학적인 기록을 하면서 개인 서명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인류가 보내야 했던 시간은 또한 참으로 길었다. 목록에서 문법이 들어간 문장을 쓸 수 있을 때까지 들었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그리고 개인이 서명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인류가 치러야 했던 살육은 거칠고도 처참했다. 그리고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내면을 기록할 수 있기까지, 또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할머니가 글을 쓸 줄 모르는 분이었다고 했다. 이 글의..

TEXT 2010.08.13

모래도시를 찾아서

그 많은 폐허 도시들은 그 도시가 지니고 있는 기억을 우리에게 전해주지 못한 채 영원한 잊음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누구든 잊혀진다. 공룡도 그러했거니와 인간이라는 종도 언젠가는 잊음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잊음이라는 불길한 딱지를 지니고 이곳 지상으로 왔으나 잊음, 혹은 잊혀짐에 저항하는 존재도 우리가 아닌가.... 잊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역사를 기록하는 존재는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 존재보다 약하다. 그 약한 존재인 나는 기록되지 않고 잊혀질 폐허 도시 앞에 서 있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말대로 누가 그렇게 수없이 파괴당했던 바빌론을 다시 건설하는가. / 허수경, 모래도시를 찾아서

TEXT 2010.08.03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몸이 아픈 날이면 좀 호사를 하자 싶다. 그런 날이면 있는 돈을 다 털어 길모퉁이에 있는 그 중국집에 가서 앉아 있는다. 자스민차를 시키고 음식도 한 가지 주문한다. 자장면이나 울면 같은 것을 주문하고 싶은데 독일인 입맛에 맞춘 중국집엔 그런 음식이 없다. 나는 마늘이 많이 들어간음식을 하나 주문한다. 더운밥이 나오고 음식이 나오고 젓가락이 나오는. 독일 어느 작은 도시 길모퉁이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물만두도 없고 우동도 없건만 갑자기 문지 김병익 선생님과 경숙이와 함께 홍대 근처 중국집에 앉은 것 처럼 편안하다. 선생님은 우리가 그곳에 들르면 없는 시간을 내주시곤 했다. 선생님을 모시고 중국집에서 밥을 먹었던 기억이 떠오르면 내가 앉아 있는 길모퉁이 중국식당은 대륙을 넘어서 그곳, 친근한 ..

TEXT 2010.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