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또 아, 네......하는 표정으로 내 눈을 잠깐 사이나마 똑바로 응시했다. 순간 나는 그녀의 눈빛이 청와빛으로 변해 말갛게 빛나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강진 어디 바다에 가면 고려 때 청자, 청와를 싣고 중국으로 가던 배가 난파해 바닷물이 청와빛으로 보인다지? 이런 생각에 빠져 상대의 눈을 맞받아 응시하고 있는 나를 그녀는 화닥 잠에서 깬 얼굴을 하며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튼 이 바닷길을 수로부인과 함께 여행하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하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예요?"
뭘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닌데 그녀가 깜짝 놀라며 얼굴을 확 붉혔다. 그저 말머리를 돌리고자 하는 뜻으로 무심코 지껄인 말이었는데 말이다.
한 삼십 분이나 그녀와 나는 싸우다 지친 아이들처럼 비스킷과 초콜릿을 먹는 일에만 열중했다. 어쩌다 툭 튀어나온 헌화가, 아니 수로부인이란 말을 듣고 나서부터 그녀는 못내 좌불안석인 눈치였다. 어색한 기분에 빠져 그녀를 보니 손 끝까지 투명한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그 흔하디흔한 안인숙이란 성과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나이는 나와 동갑인 서른넷이었다. 올해 유치원에 들어간 혜란이라는 이름의 여섯살 난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남편은 술담배도 잘 안 하는 그야말로 청백리인데다 지극히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어딘가 모르게 행복한 것만은 아닌 어조로, 반쯤은 남의 집안 얘기를 하듯 말했다. 사람이 산다는 게 어쨌든 완전할 수도 또 완전하지도 않은가 싶다. 만약에 그렇다면 왜 세상에 그렇게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노래가 있고 또 예깃거리가 있으랴.
버스가 평해를 지나갈 때쯤에 그녀와 나는 어느덧 달뜬 마음으로 [헌화가]에 대한 얘기를 길게 주고받고 있었다. 마치 교실에 앉아 늙은 선생님한테 {삼국유사}를 배울 때처럼 혼곤한 표정들로 말이다.
"신라의 시가(詩歌)는 대개가 이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지점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요. [처용가]도 물론 마찬가지구요. 그러니까 뭐 천리 해안선을 따라 생겨난 노래들이랄까요."
"듣고보니까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수로부인을 두고 신라인의 영원한 애인이다 라고 말한 학자가 있어요. 단지 한 남자의 아내가 아니라 강릉까지 가는 바닷길에서 퍼레이드를 벌인 미세스 신라였다는 말이지요."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죠?"
버스는, 구비구비 틀어진 길을 가마처럼 흔들거리며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뒤에는 하나둘 빈 자리가 나기 시작했고 시계는 오후 세시 삼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는 살구가 자꾸 익어가고 있었다.
그때에도 바다는 겁없이 길섶으로 양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던 도중 수로부인이 절벽 위에 있는 철쭉꽃을 꺾어달라고 하자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그 꽃을 꺾어 바치며 읊은 노래라고 합니다. 임해정이란 곳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다고 하죠 아마."
"......"
"붉은 바위 가에, 암소를 잡은 손 놓으시고, 나를 안 부끄러워 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하는 거죠. 아무튼 수로부인이 절세미인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인 모양입니다."
"왜 남편도 있고 종자들도 있는데 하필이면 노인네가 꽃을 꺾게 놔뒀을까요?"
"그렇다면 우선 헌화가란 향가가 나오질 않았겠죠. 순정공은 아마도 절벽에 올라갈 만큼 용기가 없었던 사람 같습니다."
"하지만 노인네도 올라가잖아요."
"옛날 시가는 오늘 날의 시보다 훨씬 더 상징적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그게 꼭 노인네인가 하는 것은 여러가지 의심할 점이 많아요. 노인이란 학식이 깊었던 현자를 일컬을 수도 있다는 거죠. 또한 소 얘기가 나오잖아요? 소는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그 심우(尋牛)의 소인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러니까 소에게 풀을 먹이고 있던 현자란 웬 젊은 스님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이쪽에서 보면 불륜, 저쪽에서 보면 파계 뭐 그런 거네요."
"수로부인은 정절을 강요받은 조선의 춘향이 하고는 다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요. 신라 사회의 분위기는 의외로 제도나 도덕보다도 미를 우선 가치로 삼았는지도 몰라요. 또 미라는 건 구경꾼이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거잖아요. 창밖의 여자, 창 안의 남자 하는 식으로 말예요. 저는 개인적으로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 노래는 그런 점에서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굉장한 억지에 제가 속고 있는지도 모르지만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와 나는 잠깐 동안 파안대소 했다. 운전사가 그동안 우리가 하는 얘기를 엿듣고 있었다는 걸 안 것은 그가 함께 따라 웃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리 거슬리는 웃음 소리는 아니었다.
/ 신라의 푸른 길, 윤대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