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일을 좋아한다. 나는 녹색 고무 두건을 쓰고 언어 괴물 역할을 한다. 나는 잘 한다. 아이들을 잡아먹으려 하지만, 릴리아가 미리 연습시킨 그날의 암호를 말할 줄 아는 아이 앞에서는 움츠러든다. 오늘의 암호는 '냇물을 따라 부드럽게'이다. 어떤 아이들은 이것을 말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가르쳐 준 노래의 곡조를 기억하면 도움이 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 말을 나에게 노래로 한다. 나를 죽이고, 나를 굴복시킨다. 그들의 첫 노래로.
릴리아는 다른 언어 작업은 시도하지 않는다. 어차피 아이들은 거의 외국어를 하는 아이들이다. 그녀는 아이들의 숫자로 볼 때 그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아이들이 몇 번 웃을 수 있게 해주고, 이어 그 아주 부드럽고 기묘하고 과장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읽어 준다. 아이들이 무엇을 이해하는지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어한다. 언어를 웃음거리로 삼는 창백한 백인 여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한다. 아이들이 엉터리로 말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수업이 끝날 때 우리는 아이 하나하나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많은 프리랜서들이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이런 일을 돌아가며 맡는다. 따라서 우리는 아마 올 여름에는 이 아이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나는 가면을 벗는다. 우리는 아이 하나하나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어 준다. 안아 주려고 반쯤 들어올리면, 아이들은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바로 그 크기, 나에게는 너무나 경이로운, 그리고 끔찍한 바로 그 무게다. 나는 아이들이 보고 싶을 것이라고 말해 준다. 아이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른다. 나는 아이들을 내려놓는다. 나는 몇몇 아이들이 조금 더 오래 나를 쳐다보는 것을 느낀다.
어떤 아이들은 내 목소리가 내 입에 맞추어서 움직인다는 것, 진짜로 내 얼굴에서 나온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놀라는 표정이다.
릴리아는 모든 아이에게 스티커를 나누어 준다. 그녀는 출석부를 보고 해 모양의 배지 안에 아이들 이름을 적는다. 그녀는 모두 훌륭한 시민이었다고 할한다. 그녀는 이름을 중얼거리며 얼른 스티커에 적고, 나더러 교실에서 나가는 아이들 가슴에 그것을 달아 주게 한다. 말없는 얼굴들이 줄지어 있다. 나는 머리 속에 아이들 이름을 적는다. 그녀는 최대한 성의를 다해 아이들 이름을 부른다. 고저와 억양까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나는 그녀가 원주민의 아름다운 언어 여남은 가지를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 주는 그 어려운 이름들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 이창래, 영원한 이방인, p.563-565
한 권의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도무지 어느 한 문장에 밑줄을 그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모든 문장에 공감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 기어코 마지막 단락에서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쉬고 필사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간절한 음성이 들려온다. 슬픈 만큼 반갑고 고마운 생각이 든다. 살면서 반복되는 몇 개의 질문들 가운데 타인의 문장을 통해 해답이 아닌 실마리를 발견할 때가 있다. 그 문장이 내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 놔주지 않는다. 서늘한 회색이 사방에 우뚝하니 서서 나를 지켜보던 가운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 순간 또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 서울은 여전히 더위로 타들어가던 그 때, 8000km 밖에서 얼음처럼 굳어버린 내 귓가를 때려부수는 소리, 그 낯선 소리가, 내 이름이었다. 그 순간은 내가 가진 화석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