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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 아닌데

Day_dreaming 2011. 10. 6. 06:27
인디안썸머가 끝나고 오랜만에 아니 다시 그리고 이제는 익숙해진 거센 사나운 바람이 불어닥치는 이 도시의 밤
지난주부터 휘몰아친 몇 가지의 일들로 나와 율리아는 거의 집 안에 틀어박혀 각자의 리듬속으로 그렇지만 식사와 샤워시간을 눈치것 잘 배분하여 이 고요한 아파트에 몸을 숨기고 있다 베지터리언에 사과주스 마시는게 고작인 애가 근래들어 새벽마다 부엌에 맥주와 와인병을 하나씩 쌓아두는 것 보면 보통 심란스러운 상태가 아니군 짐작이 간다 요며칠 우리는 화장실보다 부엌을 더 자주 들락거리며 신문고를 두들겨댔다 양파 당근 올리브 브로콜리 피망 나름 텍스타일 화인아트 하는 사람들이니 색조합과 배합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음식에 한풀이를 해댄다 씻고 자르고 볶고 두들기고 끓이고 김을 모락모락 피우면서 모멸감 답답함 그지같은 순간 미처 하지 못했던 말 결국 아무에게도 고백하지 못하는 말들을 분풀이하듯 씽크와 냄비와 팬과 숟가락에 힘껏 내친다
오랜만에 보는 지인이 전해줄 물건을 가지고 집에 들른다하기에 저녁밥을 같이 먹을 생각으로 잡채와 된장찌개 호박전을 할 계획을 세우고 작업을 빌미로 딴짓에 열중하고 있었다 2시간이면 떡을 치겠지 싶었는데 그새 1시간을 홀라당 까먹고 부랴부랴 세수하고 슈퍼에 갔다 두부를 판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반가운 마음에 갔더니 이게 왠걸 내가 생각한 뽀얗고 통통하게 살오른 네모 반듯한 놈 대신 초등학생들 밥 위에 뿌려먹는 가루마냥 말라 비틀어져 세련된 봉투에 밀봉되어 있었다 왠지 모를 배신감에 제자리에 두고 엄하게 와인 한 병만 건져 나왔다 그래도 꾸준히 해봤다고 생각보다 조리시간이 퍽 단축되어 제시간에 모든 준비를 끝냈다, 세이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해가 금새 내려앉고 바람이 땅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율리아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저녁전 큰 가방을 지고 또 나갔는데 밥을 먹다 그애 생각이 났다 설거지를 마치고 간단히 내일 아침 요기거리를 만들고 책상머리에 앉았다가 다시 율리아의 늘 빨간 얼굴이 생각났다 그러고보니 매일 냄새만 팡팡 풍기면서 그애에게 제대로 밥 한 번 같이 먹자는 소리를 안했구먼 나는 갑자기 피우던 담배를 비벼끄고 별안간 부엌에 다시 들어가 호박을 꺼내 계란에 옷을 입혀 팬을 달구고 굽기 시작했다 아직 온기가 남은 밥을 참기름과 약간의 깨소금으로 버무린다음 김을 꺼내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릇에 옮겨담고 나니 갑자기 내가 뭐하고 있는 짓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빡 깨지도록 생각을 해대도 한 시간에 두 단어 조합이면 놀랄만한 일인데 마음 쓰인다고 뭔가 따뜻한게 저 아이도 필요하다 싶다고 느끼니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어대고 있더라 내가 누군가를 위해.
타인과 같이 살면 다 고달프고 지긋하고 때로 살인충동마져 느끼는 것 모두 아는데 그만큼 그 자가 조금이라도 달라진다 느끼면 게다가 힘든 기색이 보이면 아무리 돌같은 마음을 가진자라도 힐끗 쳐다보게 될터. 게다가 말이 통하든 잘 안통하든간에 수건 걸어놓은 모냥새 컵 올려둔 각도만 봐도 상태가 짐작할 정도니 그새 부부같다 어흥.  나 이러다 전업주부로 전업하는 거 아닌가 싶소만.
살면서 누군가에게 킁킁,하고 신호를 느낄 때가 있을 때 얼만큼 반응할 수 있을까. 보고싶어 미치겠어서 전화를 걸면서도 제발 받지마 받지마 혼잣말하는 그런 마음처럼, 언제까지 그렇게 팔딱꺼리며 느낄 수 있을까, 나를 나의 시간에 들어온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