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꼬리표 떼기 전 까지는 어쩔 수 없이, 능동적으로 살아가는척해도 결국 수동적으로 일정에 맞춰 선생을 만나고 작업물을 끝내는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데 진짜 홀홀단신이 되었을 때에도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을거라는 것을, 적어도 내가 손 내밀고 혹은 생산하여 들이밀지 않는 이상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자든 후자든간에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것은 늘 괴로울 수 밖에 없다. 지난 일주일동안 새작업을 시작하지도 못했는데 호랭이 선생을 만나러 가야하는 상황에서 어제밤부터 전전긍긍 하고 있다가 결국 갔다 어차피 도망칠 수 도 없을거니와 나이들수록 드는 생각이지만 먼저 맞는 매가 더 낫다. 아 정말 나는 왜 이럴까.
들어가자마자 점심시간이 가까워서인지 배가 고프다며 빵 좀 먹겠다고 우적우적 입을 움직이면서 그래서 공연은 했냐 안했냐 됐나 안됐냐 오늘은 뭘 보여줄꺼냐를 쉬지않고 물어재꼈다. 석 달 정도 지나고 나니 이런 분위기는 어느정도 적응되서 잠자코 하시고싶으신 말씀 다 하시게 내비두고 후에 말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기다렸다. 더듬더듬 보고겸 그래서 뭘 할 거긴 할 건데요 라고 개미만한 목소리로 한참을 설명하다가 훗훗, 이 나라 발음은 도무지 흉내도 못 내겠지만 암튼간에 격려를 쏟아붓더니 학교에 올 때 마다 갖고 다니는 본인의 노트를 후르륵 넘겼다. 선생일 하면서 그간 학생들 보며 하고싶은 말을 글로 적어놓은, 일종의 잠언집 같은 것을 펴더니 느닷없이 질문을 했다.
너는 나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나?
아니오.
응 좋아, 그러면 너는 영웅이라고 생각하나 아니면 희생자라 생각하나?
순간 victim 발음을 제대로 못 알아듣고 잠자코 있자니 그 우렁찬 목청으로
victim or hero?
아... 그게..
그 중간?
아...네. 이런 어중간한 대답은 안 좋아하는 성격이신지라 재빠르게 다음 질문으로
너는 지금 안에있냐, 밖에 있냐?
네?
그니까 너라는 사람 자체는 네 안에 있냐, 세상 밖에 있냐?
아, 안쪽인 것 같은데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들 밖으로 나가려고들 난리인데 다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몇 개의 질문을 이어갔다 본래 심리테스트 같은 것 좋아하는 성격이라 갑자기 홀딱 빠져서 꺄르르 웃고 열심히 대답했다 나는 왜 이럴까.
그러면서 선생님은 말했다.
하고, 생각하고, 반복해.
자 다시.
우선 하고, 생각하고, 그것을 반복해. 머리로 먼저 하지 말란 말이야. 하고, 생각하고, 반복해. 알겠나?
아, 네.
있다,없다로 들었다놨다 하더니 마지막엔 결국 잠언인듯 가장한 강령을 내리고 떠나갔다 나는 이 선생님을 만날 때 마다 송곳으로 찔리는 느낌을 받는데 지난번에 이 말을 해줬더니 매우 좋아라했다 정말 푼크툼, 그 자체다 가끔은 너무 확신에 찬 어조로 예스 오아 노, 있냐 없냐라는 식의 질문을 받거나 코멘트를 들으면 속이 시원하다 세상에 이런식의 말을 하는 사람이 이제는 거의 없으니까.
그리고 미래를 말하라했다 과거에 사로잡혀있는 인상이 강하다며 현재의 너는 무엇이냐,라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와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즉각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순발력있는 말 대신 상대를 찌를 수 있는, 움직일 수 있는 것을 보여줘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