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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1926년 여름

Day_dreaming 2008. 2. 7. 11:01

파스테르나크와 츠베타예바, 그리고 릴케



1926, 시인이 편지를 주고받을 무슨 일이 있었을까


5 12,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쇼스타코비치Shosrakovich 교향곡 1 F단조를 초연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아홉살이었다.


6 10, 카탈로니아에서 태어난 늙수그레한 건축한 안토니오 가우디가Antonio Gaudi 날마다 그랬듯 바르셀로나 가족 성당 건설현장을 나와 같은 동네에 있는 교회에 저녁 예배를 드리러 걸어가는 길에 전차에 치였고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쓰러져 있다가(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죽었다.


8 6, 미국 수영선수 거트루드 에이덜리Gertrude Ederie 아홈 살이었는데 프랑스 그리네 Gap Gris-Nez에서 영국 킹스타운까지 14시간 31 만에 헤엄쳐갔다. 거트루드는국해협을 헤엄쳐서 가로지른 번째 여성이 되었다. 주요 스포츠 종목에서 남자가 세운 기록을 여자가 갈아치운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8 23일에는 영화계의 스타 루돌프 발렌티노Rudolph Valentino 뉴욕의 병원에서 심내막염과 패혈증으로 숨졌다. 9 3, 베를린에서 높이 138미터에 식당과 전망대를 갖춘 철제 방송탑(풍크투름Funkturm) 준공식이 있었다.


1926년에 출간된 책들은 다음과 같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2, 하트 크레인의 [하얀 건물], 밀른 AA [곰돌이 ], 빅토르 시클롭스키의 [ 번째 공장], 루이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 D.H.로렌스의 [날개 돋친 ], 헤밍웨이의 [해는 다시 떠오른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T.E 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


1926년에 개봉한 영화는 다음과 같다. 프리츠 랑의 [메트로 폴리스], 프세볼로트 푸돕킨의 [어머니], 르누아르의 [나나], 허버트 브레넌의 [ 제스트]


1926년의 희곡 . 베르톨르 브레히트의 [인간은 인간이다], 콕토의 [오르페우스].

12 6, 발터 베냐민은 체류 예정으로 모스크바에 온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그때 서른 여섯이었는데, 해에 그를 만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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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테르나크는 마리나 츠베타예바가 러시아를 떠난 츠베타예바와 파스테르나크는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대화 상대가 되었다. 파스테르나크는 츠베타예바가 자기보다 위대한 시인이라고 암묵적으로 인정했고 자기가 글은 츠베타예바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었다.

츠베타예바는 서른네 살이었는데, 파리에서 남편과 아이와 함께 궁핍하게 살았다.

릴케는 쉰한 살이었는데, 스위스에 있는 요양소에서 백혈병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편지:1926 여름] 예술의 성스러운 섬망 상태의 초상이다. 참가자는 셋이다. 신과 숭배자, 숭배자는 서로를 숭배하기도 했다.(그리고 그들이 편지를 읽는 우리 독자들은 사람도 후대에 신이 되다는 것을 안다.)


젊은 러시아 시인들은 문학과 삶에 대해 열렬한 편지를 주고받다가, 시의 화신가도 같이 여겼던 위대한 독일 시인과도 서신 왕래를 시작한다. 사람 사이의 러브레터는 시와 정신의 삶에 대한 열정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거침없는 감정과 순순한 열망의 영역을 보여 주는 편지들로 그저 "낭만적"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많은 것을 놓쳐 버리게 것이다.


독일 문학과 러시아 문학은 특히 정신적 고양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츠베타예바와 파스테르나크는 독일어를 알았고, 릴케도 러시아어를 공부해서 숙달해었다. 사람 모두 언어로 공포된 '문학적 신성'이라는 꿈으로 가득 있었다. 러시아의 시인은 어릴 때부터 독일 시문학과 음악을 사랑했고( 사람 어머니가 피아니스트였다.) 시대 가장 위대한 시인은 괴테와 휠덜린(1779-1843, 독일 대표 서정시인) 언어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릴케에게 영향을 릴케의 사랑이자 스승은 페테르부르크 태생 작가였는데, 릴케는 사람과 함께 차례 러시아를 여행했고 뒤로 러시아가 자기의 진정한 정신적 고향이라고 생각했다. 릴케가 번째로 러시아를 여향한 것이 1900년이었다. 그때 파스테르나크는 실제로 릴케를 보았고 아마도 젊은 릴케와 인사를 주고받았을 듯하다.


유명한 화가였던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와 릴케는 면식이 있었고 미래의 시인 보리스는 살이었다. 파스테르나크는 릴케가 애인 안드레아스 살로마Lou Andreas-Salome 함께 기차에 오르는 모습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했고 장면이 파스테르나크의 가장 뛰어난 산문 [안전통행증 Safe Conduct] 머리에 나온다.(존경의 뜻으로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츠베타예바는 물론 릴케를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시인은 모순적인 것으로 보이는 욕구 때문에 괴로워했다. 절대적인 고독을 원했고 비슷한 정신을 지닌 사람과 강렬한 교감을 하기를 원했다.

"절대적으로 고독할 때만 목소리는 순수하고 뚜렷하게 울려 나옵니다."

파스테르나크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이다. 완고함에 의해 조율된 열정이 츠베타예바의 전체를 움직이는 힘이다. 츠베타예바는 [양심의 견지에서 예술 Art in the light of conscience 1932]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인의 기도는 가지뿐이다. 받아들일 없는 것을 이해하지 않게 달라는 . "이해하지 못하도록 주십시도, 유혹되지 않도록(...)듣지 않도록 주십시오, 응답하지 않도록..." 시인의 기도는 오로지 듣지 못하게 달라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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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릴케의 삶의 특징인 투스텝은 (대부분 여성인 다양한 상대와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드러나지만)친밀한 관계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무조건적인 공감과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이다.

젊은 시인이 릴케의 추종자를 자처하기는 하였으나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는 대등한 사람들끼리의 대화가 되었고 닮은 점을 서로 내세우는 경연장처럼 되었다. 릴케의 위엄 있고 때로 거만하기까지 편지투를 아는 사람이라면 릴케가 자기를 숭배하는두 러시아 시인과 마찬가지로 열렬하고 들뜬 문체로 편지를 보면 놀랄 것이다. 그러나 릴케로서도 정도 수준있는 대화 상대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릴케가 1903년에서 1908년사이에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드러난 제왕적이고 남을 가르치고 싶어하는 모습을 완전히 사라졌다. 오로지 천사 같은 대화뿐이었으며 가르치려는 이도, 배우려는 이도 없었다.


오늘날 랩소디처럼 열정적으로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용인되는 곳은 오페라뿐이다. 리하르트 슈타라우스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작품의 가사는 릴케와 동시대에 살았던 후고 호프만슈타의 작품이다.) 마무리하는 이중창도 감정이 철철 흘러넘친다. 아리아드네와 바커스가 부르는 사랑의 찬가, 사랑을 재탄생이자 변화의 계기로 치켜세우는 이중창을 듣는 편이, 시인들이 사랑의 감정이 솟구친다고 털어놓는 듣는 것보다 차라리 불편할 것이다. 게다가 편지들은 이중창으로 끝을 맺는 것도 아니다. 삼중창이 되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마는 이중창이다. 사람은 서로에 대해 어떤 종류의 소유 관계를 기대했던 것일까? 이런 사랑은 얼마나 소비적이었고 어느 정도 배타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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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왕래는 파스테르나크 아버지의 주선으로 릴케와 파스테르나크 사이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다음에 파스테르나크가 츠베타예바에게 편지를 쓰라고 릴케에게 제안하여 사람의 편지 왕래가 되었다. 츠베타예바는 뒤늦게 합류했지만, 츠베타예바의 욕구, 대담성, 감정적 솔직함이 하도 강렬하고 도발적인 탓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불타오르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 불요불굴의 기질을 지닌 츠베타예바는 파스테르나크의 보폭을 넘어서고 릴케도 넘어섰다. 파스테르나크는 이제 릴케에게 무얼 요구해야 하는 없게 되어 한발 물러선다.(츠베타예바도 파스테르나크에게 사이의 편지 왕래를 중단하자고 한다.) 츠베타예바는 에로틱하고 사람을 집어삼킬 듯한 관계를 꿈꿨고, 릴케에게 만나자고 간청했으나 릴케는 달아난다. 릴케는 침묵에 잠긴다.(819일에 편지가 릴케가 츠베타예바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다.)

수사적 표현의 흐름은 고결함이라는 절벽 꼭대기까지 다다랐고 히스테리, 번민, 두려움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러시아 시인에게 죽음은 무척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자연의 신비"( 사람은 릴케를 이런 존재로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러시아 시인은 얼마나 충격을 받고 혼란에 빠졌던가. 침묵은 온전해야 한다. '죽음'이라는 이름을 갖게 침묵은 온전함을 잃고 손상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니 편지 왕래는 계속되어야 한다.


츠베타예바는 12 릴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드고 며칠 릴케에게 편지를 쓰고, 이듬해에는 산문으로 송시를 바친다.(당신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릴케가 죽고 5년이 흐른 뒤에 파스테르나크가 완성한 [안정통행증] 원고 부분에는 릴케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하되어 있었다.(단신이 살아있다면 오늘 편지를 당신께 보낼 겁니다. 라는 편지였다.) [안정통행증] 회상록 비슷한 생략적인 산문의 미로를 따라 독자가 시인의 내성이라는 핵심에 도달하게 하는 글로, 릴케의 영향 아래에서 것이며 무의식적으로라도 릴케와 겨루며 글이다. 릴케의 산문 가운데 가장 뛰어난 [말테 라우리츠 브리게의 수기] 능가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에 필적할 만한 글을 쓰려 것이다.


[안전통행증]에서 파스테르나크는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완전한 감정이 공간으로 터져 나오고 앞에 공간 전체가 펼쳐져 있을 " 위해서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편지들에서만큼 간략한 안에서 서정시의 힘이 이렇게 눈부시고 열정적으로 표현된 적은 없었다. 츠베타예바는 1925 7월에 편지에서 일단 "리라의 노예" 이상 시는 져버릴 끊을 수도 없다고 파스테르나크에게 이른다.

"친구여, 시는, 사랑도 그렇듯이, 그것이 당신을 떠나기 전에는 헤어질 없는 것입니다."

혹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는, 츠베타예바와 파스테르나크는 릴케라 중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릴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사람은 믿지 않으려 한다. 우주적으로 보다 도무지 부당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15 뒤인 1941 8, 츠베타예바가 자살했다는 소식에 놀라고 회한을 느낀다. 1939, 츠베타예바가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을 , 돌아오면 파국을 피하지 못할 것임을 파스테르나크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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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충분했다.

릴케와 츠베타예바가 실제로 만났다면 서로 무슨 말을 했을까?

우리는 파스테르나크가 13년만에 츠베타예바와 잠깐 재회했을 하지 않은 얘기가 무엇인지는 안다. 1935 6, 파스테르나크가 '소련 공식 대표'라는 끔직한 임무를 띠고 '문화 수호를 위한 국제 작가 대회' 참석하러 파리에 도착한 날의 일이다. 파스테르나크는 츠베타예바에게 모스크바로 돌아오지 말라고, 돌아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다.


편지들에 쏟아 부은 광희는 서로 떨어져 있었기에 표현 있었던 것이며 서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함에 대한 응답(위대한 작가들이 예회없이 독자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실망하는 마찬가지로)으로 나온 것이다. 1926년의 동안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상대에게 자기 자신을 내던지고 서로에게 아름답고 불가능한 요구를 타오른 불빛을 가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모든 것이 위선적 형식주의에 빠진(파스테르나크의 표현이다)" 지금 그들의 열정과 고집은 뗏목처럼, 등대처럼, 바닷가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