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점(終點)을 시점(始點)으로 박군다.
내가 나린곳이 나의종점(終點)이오. 내가 타는곳이 나의 시점(始點)이 되는까닭이다. 이쩌른 순간(瞬間) 많은사람사이에 나를 묻는것인데 나는 이네들에게 너무나 피상적(皮相的)이된다. 나의 휴맨니티를 이네들에게 발휘(發揮)해낸다는 재조가 없다. 이네들의 깁븝과 슬픔과 앞은데를 나로서는 측량(測量)한다는수가없는까닭이다. (…) 그 육중한 도락구를 밀면서도 마음만은 요원(遙遠)한데 있어 도락구의 판장에다 서투른 글씨로 신경행(新京行)이니 북경행(北京行)이니 남경행(南京行)이니 라고써서 타고다니는것이아니라 밀고 다닌다. 그네들의 마음을 엿볼수있다. 그것이 고력(苦力)에위안(慰安)이않된다고 누가 주장(主張)하랴. 이제나는 곧 종시(終始)를 박궈야한다. 하나 내차(車)에도 신경행(新京行), 북경행(北京行), 남경행(南京行)을 달고싶다. 세계일주행(世界一周行)이라고 달고싶다. 아니 그보다 진정(眞情)한 내고향(故鄕)이 있다면 고향행(故鄕行)을 달겟다. 다음 도착(到着)하여야할 시대(時代)의 정거장(停車場)이 있다면 더좋다.
/ 「종시」(終始), 윤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