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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muring of mourning

Day_dreaming 2014. 4. 1. 05:57

속독하는 버릇이 생긴 후 때때로 곤란을 겪을 때 가 있다. 오래전에 어느 사이트에서인가 헷갈리기 쉬운 단어들을 모아두고 틀린 철자를 솎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실험의 의도가 무엇이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러했던 것 같다. 한 마디로 아는만큼 보이고 한번 각인된 것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에게도 그런 단어 한 쌍이 있다. murmuring과 mourning. 대게 mourning을 morning과 헷갈리는 경우는 있다지만 나는 왜 murmuring인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기왕이면 아침이 낫지 웅얼거림이 뭐냐 삐딱하게 라고 시비건다한들 딱히 할 말은 없다. 되려 애도는 웅얼거림과 더 짝궁같이 느껴지는 걸 난들 어떡하냐. 실은 오늘도 저 단어로 헷갈렸기 때문에 생각난 말이다. 원래 책 제목은 The work of mourning 이었는데, 그걸 murmuring이라는 단어로 해석한거다 무의식적으로.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괜찮은 제목이다, 라고. 참 나.


어릴 때에는 늘 화가 나있어서 울면서도 말을 끊임없이 했다. 억울한 이유를 조목조목 따져가며 누가 듣던 않든던 간에 스스로 안들릴 때 까지 혹은 귀가 아파서 아무것도 들을 수 없을 때 까지 말을 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20대에 들어서고는 잘 안울다가 한 번 울면 처음에만 말을 하고 앞에 앉아서 우는걸 보는 친구들 얼굴 보다 복받쳐 올라 내처 소리만 지르다가 콧물 눈물 범벅으로 마쳤다. 시간이 지나고 여기온 후로부터는 소리내지 않고 울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발견했다. 내가 우는 것을 아무도 보고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순간 적막이 더 없이 큰 소리처럼 다가와 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귀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어제는 울다가 문득 그 장면이 생각났다. 문근영이 나오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잠자코 있다가 문득 떠나간 사람 때문에 갯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울기 시작하는데 극중 이름처럼 꺼이꺼이 새가 울듯 울다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름을 불렀다. 자기 이름을. 드라마의 전후 맥락을 아는 사람들은 왜 그녀가 자기 이름을 불렀는지 안다. 그건 아기들이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는 맥락과 다르면서도 또 어떤부분은 이어진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기들도 한참 울어재끼다 그치게 되는 순간은 아무도 주변에 있지 않다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인것 처럼 누군가를 위한 애도를 진심으로 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슬프다고 울어재끼는 것 조차 타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데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더 슬픈 것일지도 모르겠다. 좀 쓸쓸하고 해서 외롭고 때문에 눈물이 난다라는 것을 점점 입밖으로 내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