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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다고 믿는 것이다

Day_dreaming 2013. 7. 5. 19:13

"그런 의미에서 안느가 사진첩을 보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언어능력에 고장이 이후 그녀는 거의엄마”(mere)아파”(mal)라는 두개의 외마디 단어밖에 내뱉지 못한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으로 완성된 문장을 말하는 때가 바로 장면이다. 어렸을 때의 사진을 한장씩 넘겨보며 그녀는 말한다. “아름다워.” “뭐가?” “인생이.” “(…)” “ 같아.” “(…)” “인생은 길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안느의 의중을 조르주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기는 관객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아름답다인생은 길다라는, 언뜻 보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을 안느는 동일한 표정과 어조로 말했다. 명제 사이에 안느는 어떤 접속사도 집어넣지 않았다. 마지막 말들은 무슨 암호처럼 조르주에게 건네진다. 그래서 이야기의 후반부를 조르주가 떠맡는다. 그가 해야만하고 수밖에 없는 일은 안느의 마지막 명제에 기대어서 그녀의 비명(“엄마아파”) 의미를 번역해내는 일이다. 자신이 번역한 대로, 그는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이다."

/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죽일만큼 사랑해, 출처 씨네21



보름만에 서울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느때처럼 첫번째 수신자는 엄마. 몇 가지 보고할 사항들을 서로에게 묻고 답하고 김치찌개를 올려놓은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급하게 전화를 건넨다 두번째 수신자는 아빠. 이미 엄마를 통해 들었던 서로의 이야기들을 재차 확인한다 화제가 떨어질 즈음 다시 엄마에게 전화를 건넨다 곧이어 이미 통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주변에서 서성이던 할머니의 차례가 마침내 돌아온다. 할머니 잘 있었어 몸은 건강하고? 나야 뭐 맨날 똑같지. 엄마가 해놓은 밥 먹고 권사님 집사님들집에 마실갔다오고 또 밥먹고 그래. 다들 건강하셔? 응 그렇지. 근데 얼마전에 미국에서 손녀들이 놀러와서 전처럼 편하게 못 놀러간다. 40일정도 있다간다고 했는데 20일정도 남았어.-날짜를 세는 것 보면 아직 정신은 온전한데 것보다 얼마나 나머지 20일이 얼른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을까 할매는- 그렇구나 근데 얼마전에 갑자기 할매 생각이 났다가 마음이 불안한거야 별 일은 없지? 응 난 뭐 매일 똑같지. 네 엄마가 차려준 밥 먹고 잘 있다. 응 다행이다. 근데 음성들으니 좋다 얼굴도보니 좋다 음성들으니 마음이 놓인다 너는 언제오니 이번 여름엔 못오니? 응 아마도 그럴것 같아. 그래 몸 건강하고 음성들으니 좋다 얼굴도 보니 좋으네. 응. 응.


할매 자신은 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얼굴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는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한지 일 년이 넘었고 그 흔한 영상통화라는 것도 해본적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의례 그렇듯 목소리를 들으면 보인다고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죽은지 반 세기 가까운 할아버지도 그랬고 이제는 볼 수 있어도 보고있지 못하는 나에게도 그렇다 할매는 그래도 믿는다 우리가 지금 같이 있다고.



"나의없음 너의없음 서로를 알아볼 ,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이상 없어질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출처 씨네21



당장 볼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 할 때에는 우리가 함께했던 마지막 만남을 떠올린다 단 한 번도 그것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헤어진다 돌아서서 한참 지나 다시 돌아섰을 때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날들이 서로에게 찾아들 때 언제가 마지막이었고 실은 이미 예고된 이별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 번 있었던 것은 절대 없었던 것이 되지 않는 것 처럼 존재했었다, 라는 사실만이 남겨진 날들에서 어떤 이별을 또 예측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