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게 하라. 언제나 너희는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의 문제다.
너희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너희를 지상으로 누르고 있는 시간이라는 끔찍한 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너희는 여지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얼 가지고 취하는가?
술로 또는 시로, 또는 당신의 미덕으로, 그건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하여간 취하여야 한다.
-샤를르 보들레르
한 시간반 가량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나는 두 차례 시계를 보려 시도했고-결국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첫 곡이 연주되는 동안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의 기록촬영을 이해해주십사,라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철커덕 거리는 버튼 소리가 미친듯이 귀를 파고들어 이미 마음 한 켠에 작은 화가 솟아있었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소소한 원인들, 혹은 억지스러운 단서들일 뿐이고 정작 문제는 그 전 날 밤부터 지속되어오고 있었다.
오전에 아침밥을 먹으면서 그동안 미뤄온 '탈북 관련' 다큐 프라임을 봤다. 총 3부작으로 구성된 이것은 실상을 알려주는 1편,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3박4일간의 '캠프'를 통해 기성세대와는 조금은 다른 면모를 드러내며 그들 나름의 '화해의 무드'로 조망하는 이야기, 이 모든 것들의 총합이자 이미 통일의 준비는 시작되었다,라고 나름의 따뜻한 결론으로 맺는 3편까지, 총 1시간 반 가량에 걸쳐 보았다. 1편의 긴장감과 2편의 훈훈함, 3편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만 설명하기엔 가슴이 먹먹해져왔고 무언가가 잔뜩 조여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문득 그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났고, 언젠가는 제대로 된 소설을 써야하지 않을까,라는 작은 결심도 했다. 취재와 구성, 그 사이를 오가며 내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오해와 예기치못한 사실을 접하게 될 거라는 짐작까지 이미 개요를 다 짠 듯한 느낌마져 갖게되었다. 뭐든 발상이 머리속으로 시작될 때에는 분주하고 바쁘며 요란스럽다. 문제는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느냐 마냐,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과 포기하는 사람, 그것이 내가 될 지 남이 그렇게 될 지를 지켜보는 것, 어떻게든 출구가 찾아야하는 것.
그러다 문득, 포기, 라는 단어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렇지. 나는 살면서 이 포기라는 단어앞에서 얼마나 자유로웠나, 혹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고. 사연없는 사람 없듯 그리 평탄하게만은 살아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쩌면 나 스스로 그 단어를 끔찍하게도 두려워하지 않았나 싶다. 무엇을 위한 포기, 그 후에 감내해야 할 것들에 대해 미리 거대한 성을 쌓고, 설계도는 후에 그리는 식으로 조삼모사의 생을 살지 않았나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집어든 전혜린의 산문집을 읽어내려가면서 나도 그녀처럼 '권태'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되물었다. 갑자기 모든 공포가 다시 엄습하는 것처럼 몸이 바르르 떨렸다. 담배를 태우다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있자니 모든 낡은 것들이 내몸에 눌러붙은 듯 초라하기 짝이없어 보였다. 지긋지긋하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꺼져버렸다. 그러면서 갑자기 서운하고 울컥한 심경에 빠져들었다.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어느새 손에는 전화기가 쥐어져있고 그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요며칠 나의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아있는 것 같다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별 일 없다 말을 잘랐다. 되도록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내 말을 참고있었지만 그는 내심 신경이 쓰인건지 할 말이 없어서였는지 몰라도 또 다시 나에게 왜 그러냐며 되물었다. 나는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고 이러다 기분이 더 안좋아질 것 같아 통화를 멈추길 제안했다. 그러면서 혼자 속으로 해야 하는 말, 내가 이래서 너한테 전화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을 그에게 해버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는 지난 1년동안 그 말을 나한테 몇 번이나 했는지 아냐, 하하, 라고 재빠르게 대답했다. 나는 갑자기 억울함과 동시에 서글픈 감정이 물밀듯 밀려와 더 이상 전화기를 붙잡고 있을 수 가 없었다. 그래, 끊자. 안녕.
원인을 생각해본다. 오전깨에 본 다큐멘터리 때문인가, 전 날 저녁에 본 케빈에 관하여라는 영화 때문인가, 아니면 생리 증후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에 말처럼 또 우울해지기 시작한 것인가…. 원인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뒤엉켜 내 눈과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이유로 성립되지 않으며 내가 어딘가 이상한 것인가, 하고 다시 되묻는다.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사람은 왜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행복이나 이상추구 등의 단어가 정당방위처럼 내 몸을 두드릴 틈도 주지않고 나는 멀찌기 나를 들여다본다. 홧김에 무언가를 하기에도 이제는 겁이 난다. 그러면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싶어하는 것인가. 왜 괴로워하면서도 이곳에 있는 것인가, 살고 있는 것인가. 나는 하루하루 내가 소비하는 것들로부터 떳떳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모든 것들을 훗날 타인들을 위해, 적어도 나의 부모와 친구들에게 도움이나 선물로 되돌려 줄 수 있을까. 가끔은 미친듯이 쓰고싶다가도 아무도 읽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온몸이 얼어버린다. 소설, 글쓰기는 왜 하고 싶은 것인가. 쓰고있을 때의 즐거움, 아니 더 없이 다른 잡념들이 밀려오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의 기분 때문에 철저히 모든 것으로부터 숨어들기위해 글을 쓴다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내 행위를 의식적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최근에 가장 주목받고 있는 뉴재즈 분야 뮤지션이라는 사람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서 모든 상념들이 지나치고 사라지고 과일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가 바람과 함께 툭 하고 떨어졌다. 하나의 곡이 시작될 때, 그리고 끝날 즈음 정확하게 내 머릿속의 이야기들도 하나씩 시작되었다가 또 끝이났다. 그래서 사람들의 박수치는 행위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소리에 맞춰 눈에 띄지않기위해 함께 박수를 치고는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도 간간히 드는 생각. 그는 정말 나를 사랑하기는 할까, 따위의 구질구질하고도 말로 뱉을 수 없는 이야기들만 머릿속을 유영했다.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과 우르르 밖으로 빠져나왔다. 날은 한창 눈을 찌푸리고 곧 비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이곳 날씨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지친 한숨이나 급격한 몸의 변화가 일기도 전에 나는 빠르게 체념한다. 그리고 이 멈추지 않는 생각의 고리들을 잠시 남들과 눈을 마주하면 잊으려 노력한다. 사람들의 눈에도 각자의 근심 걱정 소망 상처들이 그렁그렁 들어차있지만 그들또한 나처럼 잠시 다른 사람들과의 눈맞춤 속에서 생각을 끊어본다. 가끔 길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볼 때 저 사람은 행복하고 저 사람은 가엽고 저 사람은 곧 죽을 것 같구나, 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곧 타들어갈 것 같은 마음의 소유자에게 한 번 만나고 지나칠 인연이라도 잠시 눈을 마주쳐볼 텐데. 아마 이 또한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호의를 배풀었구나, 하며 쓸데없는 만족감에 젖어들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길을 걸어갈 때, 어떤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 눈을 마주쳐주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속절없는 희망, 나는 아직 체념할 것이 많이 남아있는 가.
차가운 비를 맞으며 여기서 저기로 찻집에서 식당으로 몸을 이동하면서 온전히 추운 몸에 집중을 해본다. 감기가 걸릴 것 같은 기운, 하루종일 침대밖을 벗어나지 못한채 펄펄끓는 머리와 몸을 뒤쳑이며 악몽이나 잔뜩 꿔버렸으면, 하고 생각해봤다. 분명 골치아프고 막상 아프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스스로 괴로워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생각은 멈추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쉽게 아프는 편이 아니다. 게다가 최근에 너무 꾸준한 운동까지 하고 있지 않나.
친구와 가끔 들르는 이태리식당에 가서 양껏 음식을 주문해놓고 와인까지 들이키며 그의 흉, 친구의 애인 흉, 그리고 과연 우리는 왜 연애와 사랑을 멈출 수 없는 것인가를 폭포수마냥 쏟아내었다. 어차피 결론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라도 가끔 이런 소비적 활동후에 느끼는 쾌감같은 것이 있다. 헤어지는 것 조차 내 삶의 실패라 여겨 나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주 가느다란 완성이 내 안에 이미 있다고 착각하고 그 조각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공, 명예, 돈 따위보다 내가 불안해지기 두려워서 그렇다고 안락한 삶의 권태로 빠져들기는 더더욱 두려워서 이 모든 것을 매일매일 반복하면서도 왜 나는 마음의 정착을 하지 못하고 삶이라는 것을 지속해야 하는 것인가. 쓸데없이 높아만가는 욕구, 이를테면 활자를 읽으며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하고 그런 행위를 하는 시간동안 잠시 불안함과 권태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시공간으로의 이동, 간간히 침투해오는 아름다운 말들과 생각들, 그렇지만 계속해서 미루는 미래, 지금이 없고 내일의, 내일의 약속을 위해, 내일의 이벤트를 위해, 다가올 휴가와 고대하는 만남을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위해 나는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인가, 하지 않는 것인가.
교훈적 삶, 으로부터 절실히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마음의 닻을 가지고싶다.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의 손이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그, 라고 명명하는 순간 그가 너무 멀리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나는 아마도 늘 반복되는 상황처럼 그가 내곁에 가까이 있으면 또 두려워 할 것이다. 텅 빈 마음의 한 자락에 불이 다시 타오를 것이다. 그러면서 그 공허함, 느긋한 여유로움을 갈증과 권태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퍼부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아무에게도 자리를 내어줄 수 없는 것인가. 누구에게도 초대받을 수 없는 것인가. 일상적이라는 표현처럼 무의미한 것이 또 있을까. 비일상적이기위해 우리 모두는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그것의 정점에 달아 몸이 바스라지기 일보직전 다시금 일상성이라는 신기루를 잠시 눈가에서 곱씹는 것 아닐까. 너는 욕심이 많다, 라고 그가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의 의도를 분명히 파악했음에도 그렇지 않다,고 되받아쳤다. 물질적 욕심을 말하지않고 너 스스로의 삶, 성취, 확신에 대한 것이야, 라고 부드럽게 다그쳤을 때 조차 순순히 동의하지 않았다. 아마 그가 말하는 모든 것에 나는 늘 그런식으로 청개구리식 답변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것잡을 수 없이 싸움이 커져버렸을 때 더 이상 변명의 소재가 없을 때가 되서야 나는 순순히 고백하는 것인가. 그래 내가 다 잘못했다. 하지만 그가 떠나는 것은 두렵다. 아니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나에게있어 두번째의 삶에 찾아든 그이기 때문에 그를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 삶의 실패를 스스로 낙인찍고 인정하는 것밖에 설명되어질 수 없는 참혹한 인정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옴짝달싹을 못하겠다. 멈출 수 가 없다. 삶의 마지막까지 이렇게 두드리고 헤매고만 있을 수는 없는데 오늘이 또 그런 기분이 드는 날이다. 이 글을 마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만 같은, 그래서 이을수록 난잡한 문장들의 모음이자 멈추면 이도저도 되지않는 낮잠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