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며칠 볕이 너무 좋아서 동향인 내 방은 오전시간엔 좀 더워지기 시작했다 눈을 떴을 때 어딘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역시 간밤에 비가온 탓에 기온이 좀 내려간 듯 했다 부엌에서 보니 드디어 건너집에 마지막 입주자까지 들어차고 동네가 점점 사람들로 완성되어 가는듯 보인다 정원을 가꾸고 창고수리들을 해대는 탓에 낮에는 계속 시끄럽지만 이른 오전과 노을이 진 후 노래해주는 새 덕에 요즘은 그래도 부엌에서 서성이는 것도 꽤 괜찮은 일과 중 하나다
그래도 비가 올 것 같아 가방에 우산까지 챙겨넣고 랩톱에 자와 칼 인쇄한 종이다발을 바리바리 싸서 학교에 갔다 할매와 만나는 날이다 복도에서부터 이미 목소리가 들리는 것 보니 노인네가 기운을 좀 차린 것 같았다 그치만 약속시간을 훌쩍 넘기고 말을 끊지 않는 할매를 기다리며 문앞에서 서성였는데 왠걸 어떤 애들에게도 내가 잡은 시간에 오라고 한 모양인지 잼이 되어버렸다 결국 나와 먼저 이야기하고 그 여자애들을 돌려보냈는데 앉자마자 얼굴을 보니 볕에 그을려 생기있어 보였다 그치만 바로 두통이 심하다며 잠시 전화를 걸겠다고 하고 나를 앉혀두었다 이 나라말로 말씀을 하시니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눈치가 남편에게 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를 끊자마자 남편에게 고통을 호소했다며 뭔가 정신없는 말투로 내 혼을 쏙 빼기 시작했다 해서 나까지 어지러워지기 시작해 결국 한 마디 했다 저랑 이야기하는 것 보다 좀 쉬시는게 나을 것 같은데요, 했더니 하하 웃으며 그러면 좀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다시 짐꾸러미를 싸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 근처 벤치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이것저것 작업상황 보고를 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뒤에 앉은 애들이 때마침 점심을 먹으며 좀 떠들었다가 선생님이 획 돌아보며 거기 좀 조용히 해라 내가 얘와 이야기하는 중이고 나는 지금 티칭 중이다 라고 했다 그 애들의 표정은 압권이었는데 입으로 들어갔던 샐러드가 튀어나올 듯 다물지를 못했다 한참 나에게 열변을 토하시며 또 본인의 책을 주시더니 몇 문장 읽어주고 나에게 또 물었다 아 그래 너는 내 얘기가 뭔지 다 알거다 도대체 사람들이 내는 소음으로부터 견딜 수 있는 방법은 어디서 배우는 거냐, 하고. 내가 껄껄 웃었더니 다 알잖니 하고 동의를 재촉해서 네, 하고 대답을 마쳤다
선생은 미뤄둔 약속을 이행하러 허겁지겁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잠시 벤치에 앉았다 저 양반은 너무 아이같아서 여즉 아이같아서 아프면 악 좋으면 하하 싫으면 울부짓는 사람이라 주변에 곁을 주는 사람들이 혹은 반대의 경우가 참 어려울 것 같은데 그래도 남편이 있구나. 실은 전에 친구 전시 보러갔다가 할매 남편분을 뵈었는데 키가 무척 크고 호리호리한 인상에 점잖았다 분명 집에서도 똑같이 난리를 피우시면 남편께서 괜찮아 괜찮아 다독일 것 같은 모습이 그려진다 몇 주 전 남편이 아픈 바람에 충격을 받아 본인께서 앓아 누우신 적이 있다 가끔씩 남편 흉을 봐도 뒤이어 그렇게 자랑을 늘어놓으신다 그래 저런 할매를 감싸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 너무 강렬하고 또 그만큼 부서지기 쉬운 성격의 소유자에게 집같은 사람이 있구나. 타인에게 마음을 허락해달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내 마음이 접었다 펴졌다 드러내보일 때 도망치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할까. 할매한테 이런것 까지 물을 수는 없고 자기주도학습을 해야 할 시간인가보다 젠장 그놈의 자기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