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로기완을 만났다」중에서 타인의 고통이란 실체를 잘 모르기에 짐작만 할 수 있는, 늘 결핍된 대상이다. 누군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나는 무력했고 아무것도 몰랐으며 항상 너무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의 고통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느 지점에서 고조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삶 속으로 유입되어 그들의 깨어 있는 시간을 아프게 점령하는 것인지, 나는 영원히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누구의 위로나 체온도 없이 가까스로 그 시간을 지나온 후에야 조금은 지친 모습으로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러므로 나는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로가 인터뷰 도중에 기자에게 한 말이었다. 창가에서 천천히 돌아서는 박에게 나는 그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박은 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로를 그토록 적극적으로 도왔던 건, 어머니에 대한 그의 회한에 인간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이 아니었느냐고 나는 연이어 묻는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완연히 좁아져서 나는 이제 박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박은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 대신 그는 김작가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잡지 기사의 문장이 바로 그것이었느냐고 반문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가 나 때문에 죽거나 죽을 만큼 불행해졌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사는 것, 그것뿐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나는 이어 말한다. 박은 심각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외로 숙인다. 한참 후 박은, 다른 누군가가 우리 때문에 죽거나 죽을 만큼 불행해지는 것이 가능하냐고 다시 묻는다. 나는 경직된 말투로, 5년 전의 그 간암 말기 환자가 지금도 그렇게 자주 생각나는 것은 자신이 그 환자를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냐고 따지듯이 되묻는다. “아니, 김작가가 틀렸소. 안락사라고 해서 무턱대고 환자의 몸에 약물을 투여하는 것은 아니오. 마지막 결정은 환자가 하는 겁니다. 환자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의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나의 경우엔 환자가 혼자 누워 있는 방에 약물과 술을 섞은 컵을 갖다놓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컵을 들어 그 약물을 마시느냐 안 마시느냐 하는 결정에 의사로서의 나는 개입할 수도 없을뿐더러 개입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개입하지 않았소.” “하지만 그 컵을 갖다주었기 때문에 그 환자는 자신의 선택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던 거겠죠.” “죽음 앞에서 당사자의 의지보다 더 결정적인 건 없어요.” “기적이란 것도 있지 않나요? 타인의 개입이 그 기적의 가능성을 박탈한 건 아닌가요?” 순간적으로 할말을 잃은 듯 박은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김작가는 내가 그 환자를 죽인 거라고 생각하고 있군.” “존엄성과 생명을 교환한 거라고 표현해야겠죠.” “내가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는 거요?” “묻고 싶은 것뿐이에요. 살아남은 자들, 건강한 자들, 그들은 뭘 해야 하는 건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명을 찾아내는 것 말고 죽거나 죽을 만큼 불행해진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 건지, 그걸 묻고 싶은 거라고요! 아시겠어요?” 박은 더이상 아무 말도 없이 조금씩 몸을 떨고 있는 나를 그저 창백해진 눈빛으로 보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