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1167

심상

아무런 준비없이 전화를 받는 것이 언제나 두렵다. 역시나, 너무 오랜만에 은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보고 몇 초간 멈칫했다가 결국, 받지 않았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현재'를 함께 공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급작스럽게 걸려오는 메시지, 특히 전화에 대한 공포심이 크다고. 반은 진심, 그리고 또 반은 거짓. 누군가에게 좀 더 자신을 위한 업그레이드가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한 시간과 여유의 공간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일장연설을 했다. 비판적인 시각과 애정어린 조언에 대한 궁핍함이 밀려오고 있는 시즌인데 내가 누구에게 이 따위 정정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버려진 블로그를 들여다보면서, 쉼 없이 불어재끼는 바람을 보면서 언제나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무..

TEXT 2008.04.18

아이슬랜드에서 온 편지

"진실은 그게 아닐까? 비록 우리 이렇게 멀리" "고역의 땅으로 흘러와" "후회할지라도 계속 마음을 다잡아" "공통의 신념을 위해" "개인의 다른 생각은 버리고" "손을 잡고, 발을 맞추어 이겨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항상 손을 잡는다" "겁에 질렸을 때도" "연인들은 떠날지 머물지 결정하지 못한다" "예술가와 의사는 번번히 돌아온다" "미친 사람만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의사들은 떠나면서 계속 걱정한다" "자신의 기술이 고통받고 버림받을 것을" "거인들과 요정들을 오랬동안 보아온 연인들은" "자신들의 몸집은 그대로인지 의심한다" "그리고 예술가는 조용히 기도한다" "세상 그 무엇보다 순수한 걸 찾게 해 주소서" "독특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이를테면, 역사의 모습을 깨닫게 해 주소서" "저의 ..

TEXT 2008.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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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잊었던 것을 결코 온전히 되찾지는 못한다. 그 점이 어쩌면 좋을 수도 있다. 과거를 다시 찾게 된다면 그 충격이 너무 파괴적이어서 우리는 그 순간 왜 우리가 그토록 그것을 동경했는지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동경을 잘 알고 있다. 우리 안에 깊숙이 가라앉아 망각된 것일수록 더욱더 잘 그것을 이해한다. 입에서 맴도는 잃어버린 단어는 그것을 찾는 순간 데모스테네이스 같은 날개를 달아 비로소 우리의 혀를 풀어주듯이, 지난 삶 전체의 무게로 무거운 망각된 삶은 이제 그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잊혀진 과거 습관들의 흔적이 아닐까? 베를린 연대기, 발터 벤야민

TEXT 2008.03.31

at the same time

"시간은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공간은 모든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말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소설은 공간과 시간 둘 다의 이상적인 매개체입니다. 소설은 시간을 보여줍니다. 곧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죠. 또 우리에게 공간을 보여 줍니다. 곧 어떤 일이 한 사람한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 동시에 (소설가와 도덕적 논리, 나딘 고디머 강연), 수잔 손택

TEXT 2008.02.10

후회의 다짐

후회에 대해 생각해본다.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누군가에게 나의 의견을 피력하고 나를 이해시키고 또한 공감을 얻어내려 급급해하며 슬펐다가 잔뜩 들떴다가 세상에서 최고의 기분을 맞이하기도 한다. 눈을 뜨는 아침, 그 시점이 중요하다. 어제의 흔적이 내 몸에 남아있지 않기를 그 공기들이 떠돌지 않기를 바란다. 물을 꿀꺽꿀꺽 마셔도 주위를 신경쓸 필요없는 그런 아침 코끝이 약간 시려오는 그럼 아침 아침 연속극 주인공의 목소리가 모든 공기를 좌지우지 하는 그런 아침 권위적인 기침 소리에 눌려 젓가락질을 조심스레 하는 그런 아침이 어쩌면 편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안정된 느낌을 주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소름끼치도록 모든것에 대한 저항과 두려움을 표하며 세상에 혼자 떨어진 모습을 상상하곤 하지만 모든 것은 쉽게 이루어..

TEXT 2008.02.09

re:

오랜만에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리다가 오스터의 리스트들을 다시 쭉 봤다. 작년 여름 누군가의 생일선물로 주었던 굶기의 예술 The art of hunger, 당시 내가 거의 마지막으로 샀던 기억이 난다.(그 이후 온갖 사이트를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절판되었다.) 오늘 아침 소피 꺌과 함께 쓴 책을 둘러보다가 "폴 오스터의 뉴욕통신"이라는 괴상한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신간인 것 같지 않고(네로가 뉴욕에서 친필사인을 받아준 Travels in the Scriptorium이 가장 최신작인듯) 내용을 쭉 훑어보니 굶기의 예술의 인덱스와 일치했다. 그렇다, 굶기의 예술이 재번역되어 나온것이다! 반가운 마음도 있었지만, 내심 제목이 마음에 안든다. 뉴욕통신이라니! 암튼 몇 차례 읽고 곱씹으면서 오스터의 문장에 반한 ..

TEXT 2008.02.08

편지 : 1926년 여름

파스테르나크와 츠베타예바, 그리고 릴케 1926년, 세 시인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5월 12일,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쇼스타코비치Shosrakovich의 교향곡 1번 F단조를 초연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열 아홉살이었다. 6월 10일, 카탈로니아에서 태어난 늙수그레한 건축한 안토니오 가우디가Antonio Gaudi 날마다 그랬듯 바르셀로나 성 가족 성당 건설현장을 나와 같은 동네에 있는 교회에 저녁 예배를 드리러 걸어가는 길에 전차에 치였고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쓰러져 있다가(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죽었다. 8월 6일, 미국 수영선수 거트루드 에이덜리Gertrude Ederie는 열 아홈 살이었는데 프랑스 그리네 곶Gap Gris-Nez에서 영국..

TEXT 2008.02.07